[칼럼] 고양이가 말하길, “다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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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고양이가 말하길, “다 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다.”
  • 송기춘
  • 승인 2022.01.28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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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송기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반려동물 가운데 개와 함께 고양이가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다. 사람에게 친근하게 밀착하는 개도 좋지만, 독립적인 것을 좋아하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개냥이’라 하여 개의 친밀성이 두드러지는 고양이도 있지만, 대개 고양이는 도도함 또는 ‘시크’함이 그 특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집에도 고양이가 한 마리 같이 산다. 털갈이할 시기에 극심하게 날리는 털이나 짝짓기 시절에 밤 새워 내는 울부짖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생명이 주는 즐거움은 작지 않다. 특히 귀가가 늦을 때나 아무도 없을 때 집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 반가이 맞는 이(?)가 있다는 것은 꽤 괜찮은 위로가 된다. 때로 무릎이나 배 위에 올라와 골골거리는 소리를 낼 때는 편안함을 공유하게 된다. 물론 고양이가 스스로 좋아서 해야만 가능한 것이지만.

우리 집 고양이는 내가 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몸을 배배 꼬면서 어린아이가 젖 달라는 ‘응애응애’ 소리처럼 야옹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내가 기어이 ‘추르’라는 고양이 ‘마약간식’을 하나 주고서야 끝난다. 그 전까지는 내 곁을 맴돌면서 몸을 스치고 얼굴을 부비면서 끈질기게 자기의 의사를 표현한다. “추르를 달라.” 그렇게 애타는 호소가 추르 하나로 보답을 받으면 바삐 이를 흡입한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불러도 오지 않는다. 서운하다. 그렇게 달라 해서 줬으면 고마워해야지, 고마워서 이쁜짓으로 답례라도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인다. 그러나 가만 생각하면 고양이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추르 하나 줬다고 내가 고마워서 쓸개라도 빼줄 줄 알았냐? 네가 주는 게 좋아서 하는 거지, 내가 뭐 얻어먹는 줄 아나? 대꾸할 말이 없을 메시지다. 내가 좋아서 그렇게 한 걸, 뭐 고양이가 큰절이라도 하길 바랐던가. 영락없이 고양이 집사 신세다.

군사망사고 조사를 하는 위원회 일을 하면서 몇 십 년 전에 돌아가신 분들의 사인을 잘 밝혀서 고맙다는 편지를 가끔 받는다. 글에서 전해지는 아픔과 설움이 느껴져서 눈시울을 붉힐 때가 많다. 그럴 때는 보람도 느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조사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거나 조사가 너무 지연되어 항의를 받는 경우도 있다. 사고 난 지가 오래되어 자료나 참고인을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조사관이 많은 사건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위원회나 조사관의 권한의 한계나 부족함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위원회의 책임자인 필자가 유족을 직접 만나 얘기를 듣고 조사에 반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결과가 반드시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서운함도 느끼게 된다. 우리가 가지는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대해서 ‘도와드리려’고 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공격의 화살이니 말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이런 서운함조차도 가져서는 안 될 일이다. 고양이에게 ‘집사’라는 인간이 스스로 좋아서 그 일을 하듯이, 내가 이 일을 선택하여 기꺼이 하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런 일을 할 공적인 권한을 국가기관인 위원회가 독점하고 있으니 유족의 호소나 요청,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비난과 비판도 마땅히 감수해야 할 일이다.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 그 결과로 인하여 느끼게 될 보람은 덤이겠지만, 마땅히 ‘공복’으로서 해야 할 일에 대해 상대방이 고마움을 표현해 주지 않았다 하여 서운함을 느낄 일은 아니다. 게다가 공무원들은 이미 급여를 통하여 국민적인 고마움을 환산하여 지불받은 셈이니 그에 상응한 충실한 직무수행으로 보답하면 족할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도와드리는’ 게 아니라 권한을 독점한 국가기관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최대한 성실하게 충실한 조사를 신속히 하여 유족의 아픔이 치유되도록 하는 것이 위원회의 당연한 의무임을 되새기게 된다.

이 글을 쓰는데 마침, 미국의 어느 여성이 남자친구에게 신장을 이식해 줬는데 남자가 바람이 나서 헤어졌다는 가십거리 뉴스가 눈에 띈다. 자기가 좋아서 한 일이면 그걸로 족하고, 상대방에게 감사를 기대할 일은 아니다. 봉사라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봉사는 베푸는 게 아니니까.

송기춘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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