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미안하지
상태바
그래도 미안하지
  • 법률저널
  • 승인 2009.08.25 1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머니가 흘리면 눈물도 피다. 어머니가 흘리면 땀방울도 피다. 어머니가 흘리면 한숨도 피다. 어머니가 흘리면 기도도 피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어김없이 돌아온 폭염! 저 지독한 태양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45억 년이나 타고도 저리 끄떡없단 말인가. 앞으로도 50억 년 은 건재할 거라고들 하니 저 무진장한 물건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연구에 연구를 거듭해온 과학자들이 태양의 구성성분을 밝혀놨지만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단 일초도 멈추지 않고 우리의 머리 위에 10만 럭스의 빛을 쏟아 붓는 불덩어리-저것은 필시 신으로서도 제어 불가능한 괴물일 게다. 매일 정오까지 밀어 올리지만 정상에 닿자마자 굴러 떨어지고 마는 저것은 정녕 누군가의 바윗돌일 게다. 그도 저도 아니라면 혹 신조차 맥 못 추게 만드는 불가사의파워가 존재하는 것일까. 좌우간 지구상에 태어났음이 고마운 이라면 태양에게 감사를, 생을 반납하고 싶은 쪽이라도 저 태양에게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다.

   어머니는 서른일곱에 나를 낳으셨다. 그러므로 내가 어머니 얼굴에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기 시작한 때는 당신의 춘추 사십 중반이었지 싶다. 예닐곱까지의-예닐곱 무렵의 어린이에겐 어머니가 곧 하늘이요 바람이며 길이다.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과 일발언일표정이야말로 자식의 속내에 영원한 영상으로 꽂힌다. 해마다 이맘때면 많은 이들이 피서라는 명분으로 햇빛을 즐기지만 나는 되돌아오는 슬픔을 어쩌지 못한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밭 매고 돌아오시는, 땀에 젖어 붉어지신, 깊이깊이 두레박 물 삼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햇살’은 말 그대로 태양의 화살=뜨거운 화살=불화살이다. 그 햇살에 마구 찔려 솟구친 땀방울이야말로 무색투명의 선혈이 아닌가. 사춘기와 중년을 지나 흰 머리털 섞인 오늘에 이르도록 삼복더위는 나를 목메게 한다. 이승을 뜨셨다한들, 백골이 진토 되었다한들 자식의 일이라면 여율령시행(如律令施行), 온 힘을 기울이셨던 어머니! 어머니! 
 
   김지현: 출생34개월째. 키89㎝. 몸무게13㎏. 이 ‘깃털 없는 파랑새’를 나는 오늘 잠시 봐줘야 한다. 파랑새의 엄마가 더 이상 파랑새를 잉태치 못하게끔 시술 받을 동안 이 깃털 없는 파랑새가 두뇌를 움직이며 놀 수 있도록 지혜를 동원해야한다. 노소동락(老少同樂)이라, 물경 55년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노계(老鷄)와 파랑새가 재미를 획득하려면 전적으로 노계 쪽에서 50년 세월을 싹둑 희생해야만 한다. 까짓 거, 노계의 춘추를 후리는 편이 병원 대합실을 울음소리로 채우느니보다 백 번 천 번 낫고말고. 지하철에서 읽기 위해 가지고 온 노계의 책『천 개의 고원』은 일찌감치 토트백 속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노계는 파랑새와 나란히 앉아 그림형제의 원작 동화『헨젤과 그레텔』을 무릎 위에 펼쳤다. 완전 복화술사급으로 읽어주는 노계 곁에서 파랑새의 시선은 그림을 따라가며 플롯을 이해한다. 노계는 꼬꼬댁 소리 한번도 못하고 서비스에 열중열중! 엄마아빠가 수십 번은 읽어줬을『헨젤과 그레텔』이건만 파랑새는 꼼짝 않고 관심 집중집중! 새야, 새야 파랑새야. 더 들어보렴.

   “새엄마의 꼬임에 빠진 아빠는 또 다시 헨젤과 그레텔을 숲 속에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내용인즉슨, 여차여차 …헨젤과 그레텔은 과자로 만들어진 집을 발견했고, 그 집에 들어가 맛있는 과자도 얻어먹었으며 예쁘게 살이 올랐는데 아뿔싸! 그 친절한 할머니는 사람을 잡아먹는 마귀할멈이었던 것이다. “히히히, 이제 살도 통통하게 쪘으니 잡아먹어야겠어. 야들야들 맛있겠어.” 그 혼잣말을 우연히 엿들은 헨젤은 마귀할멈이 화덕에 불을 피우느라 허리를 굽힌 사이 뒤에서 밀어버렸다. 헨젤과 그레텔을 구워먹으려던 마귀할멈은 오히려 그 불 속에서 버둥거리다가 타죽고 말았다. 헨젤과 그레텔은 길을 물어물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늦게나마 잘못을 깨달은 아빠는 마음씨 나쁜 새엄마를 내쫓아버리고 헨젤과 그레텔을 그리워하며 혼자 살고 있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헨젤과 그레텔이 “아빠! 부르며 달려오자 아빠는 울면서 용서를 빌었고, 세 식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아빠. 쫓겨나는 새엄마. “세 식구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를 강조하며 나는 파랑새에게 페이지를 되넘겨주었다. “지현아, 됐지? 아빠가 나쁜 새엄마를 내쫓아버렸대. 그래서 헨젤과 그레텔은 아빠와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대. 마귀할멈도 죽었으니까 숲 속의 과자로 만든 집에 친구들이랑 놀러가도 되고…. 재밌지? 다행이야. 아빠가 잘했지? 착하지?” 그런데 웬 걸! 천만 뜻밖에도 파랑새의 조그만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는 “그래도 미안하지!”라는 일침이었다. (……) 쿵-. 어안이 벙벙했다. 동화를 읽는 동안 노계는 즐겼고 파랑새는 사고했던 것이다. 파랑새의 말이 뜨끔했다. 뉘우쳤을지언정, 헨젤과 그레텔을 숲 속에 버리라고 꼬드긴 새엄마를 내쫓았을지언정, 행복하게 살았을지언정…. ‘그래도 미안’함이 남는 아빠라는 거. 결과로써 과정을 지워버릴 수 없다는 거. 34개월짜리의 흔들림 없는 이성-오성-감성 앞에 노계가 벅차올랐다. ‘그래, 그래도 미안하지.’

   그런저런 감동이 물결칠 때까지 지현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다. 지현과 나는 병원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내 손을 붙잡은 고사리 손의 감촉이 은혜로웠다. 이렇게 조그만 사람도 그리 반듯한 정신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니! 참으로 신기했다. 지현 엄마가 싫어하겠지만 나는 꼬마 철학자에게 사탕을 사주려는 판이다. 치아가 썩는다고, 사탕은 금물이라고 당부했지만 오늘만큼은 지현에게 최고로 맛있는 걸 쥐어주고 싶은 것이다. 구멍가게에 이르러 지현은 초콜릿과 껌을 골랐다. 좋아! 나는 흔쾌히 선심 썼다. “엄마한테 혼나면 어떡하죠?” 파랑새가 걱정했다. “괜찮을 거야. 오늘 한번만 할머니가 선물로 주는 거니까. 잘 말씀드리면 될 거야.” 지현은 지금 내 기분을 모를 것이다. ‘그래도 미안하지’라는 한마디가 어떤 값을 지녔는지 모를 것이다. 그 분별력으로 장차 인생을 디자인하게 되리라는 점을, 그 떡잎을 이 외할머니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를, 하늘이 왜 저리 푸른가를 모를 것이다.
 
   자식이 흘리면 눈물도 피다. 자식이 흘리면 땀방울도 피다. 자식이 흘리면 한숨도 피다. 자식이 흘리면 기도도 피다. 내 생명시계는 어느덧 오후 다섯 시 경을 지나고 있다. 위로는 부모님을, 아래로는 아들딸을, 더 아래로는 아들딸이 낳은 아이들을 모두 상면했다. 유유히-유장히 흐르는 생명의 강에 합류한 우리들. 태양의 출현이 45억 년이면 우리의 몸에도 45억 년 동안의 정보가 집합/집적되었으리라. 45억 년 전의 눈물과 땀과 한숨과 기도도 오늘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물은 위에서 아래로 거닐고, 나무는 아래서 위로 솟으며 바람은 내일을 향해 불었으리라. 그러나 우리가 염려하고 기다리는 바람은 향후 50억 년이 아니라 당장 건너야 할 50년이다. 아니 5년이다, 아니 다섯 달이다, 아니 닷새다, 아니 5분이다. 나 자신의 눈물과 땀과 한숨과 기도는 꽃으로도 여기면서 부모님과 자식의 그것은 왜 쇠못이 되는 것일까. 대신 살아드릴 수 없었던-대신 살아줄 수 없는 처지여서일까.

   외출에서 돌아와 발등에 들이붓는 한 바가지의 물은 얼마나 신선한가. 그 쾌감이 온몸에 퍼질 때는 내가 식물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좀더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동물인 나와 식물인 참나무의 조상은 같다. 동물과 식물이 각각 상대가 토해내는 것을 들이마신다니, 이것이야말로 환상적인 협력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구강 대 기공(氣孔)의 인공호흡인 것이다. 이 위대한 순환작용의 원동력이 무려 1억5천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태양에서 오는 빛이라니!”-칼 세이건『코스모스』. 이렇게 찌는 날 어머니가 오신다면 나는 제일 먼저 에어컨을 켤 것이다. 자식이나 여느 손님의 경우에도 우선 실내 온도를 다운시키고 다과를 준비하는 게 순서 아니던가. 다만 나 홀로 더위를 견디는 것은 이 세상엔 아직도  땀 흘리며 일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식물의 협력자로서 저 땡볕을 깡그리 사양할 수 없기 때문이며 ‘그래도 미안’한 무언가가 내내 내 안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