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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새로운 시작과 ‘목적있는 공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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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새로운 시작과 ‘목적있는 공부’ (2)
  • 신희섭
  • 승인 2015.03.1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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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며칠 동안 꽃샘추위가 옷 장 속에 이제는 집어넣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옷들을 꺼내 입게 만들고 있다. 봄이 오는 것을 시샘한다는 뜻의 꽃샘추위는 한국인들의 시적정서와 표현능력을 보여준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하는 겨울의 마지막 투정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찌되었든 다시 계절은 바뀌고 있고 시간은 역사를 향해서 나가고 있다.

시간이 역사를 향해서 굽이치며 흘러가듯이 우리도 역사를 향해서 굽이굽이 길을 닦아가고 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던 맥킨타이어의 ‘서사(narative)’라는 관점에서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거대한 역사의 일부분을 써내려가고 있고 역사 속으로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이라는 의미를 너무 거대한 것으로 생각하거나 소영웅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나는 역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이며 나는 역사‘속에서’ 어떻게 존경받으면서 ‘기억될 것인가’에 매몰될지 모른다. 하지만 나(I) 혼자 만들어가는 역사가 아니고 우리(we)가 같이 만들어간다고 보면 역사는 대서사시와 같은 것이다.

이런 인식 속에서 왜 공부를 하는가의 답은 명확하다. 역사의 흐름을 잘 알고 그 속에서 나의 의미를 좀 더 뚜렷하게 구현하고 싶은 것이다. 이때 역사 속에서 ‘우리(we)’는 의미가 상당히 넓을 수도 있고 좁을 수도 있다. 내가 만약 특정 종교에 헌신하기로 마음 먹었고 이를 통해서 작은 대안학교를 운영하거나 자율적인 대안공동체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 내게 우리라는 울타리는 대안공동체가 될 것이고 이것이 주된 ‘우리’라는 인식단위가 될 것이다. 반면에 인류를 위한 사회봉사를 위해 전세계 의료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라는 인식의 범위는 전세계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태계를 적정하는 마음으로 인간과 생태계를 큰 틀에서 같이 살아가는 동지로 바라본다면 우리라는 공동체의 인식 울타리는 인간을 넘어서 지구전체가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공부는 나와 공동체 사이의 관계에서 나의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기회를 부여한다. 너무 거대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단순화하면 공부는 나와 주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더 튼튼하게 만들 수 있는 생각의 계기를 얻을 수 있게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통해 소위 출세를 하여 경제적인 부나 권력을 쥐고자 하며 명예를 획득하고자 한다. 그것은 노력과 보상이라는 관점에서 당연한 듯이 보인다. 하지만 공부를 통한 출세라는 것이 나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하게 한다.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데 부와 권력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명예는 가능할까?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찍이 파악했던 것처럼 출세 즉 성공은 다른 시민 즉 타인으로부터 얻게 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에는 시민이라는 유산계급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성공한 삶이 되었다. 요즘으로 이야기 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이 볼 때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시민적인 덕성을 가진 ‘좋은 이들’에게서 본인이 ‘좋은 시민’이라고 인정받는 것이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민중들을 무지와 타락으로 이해한 과거 의미에서 벋어나 현대적 관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 주장의 의미를 되짚어 보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며 같이 살아가고 있는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서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는 것이 성공한 삶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했던 이야기처럼 결국 인생에서 최종적으로 성공했다는 것은 좋은 몇 사람에게서 “그 친구 괜찮은 친구야”라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런데 미래의 비전이 다양하게 많이 있는 젊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그림을 크게 그리는 경향이 있다. 인류 역사의 위인전에 기록되는 삶 아니면 신문의 어느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한국사회에서 뚜렷이 인정받는 삶이 역사속에 남는 삶이며 그것이 성공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위해서 노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목적을 가지고 목표를 이루려는 삶의 한 방편이다. 하지만 그런 목표만이 의미있는 것은 아니다.

묵묵히 일하면서 자신의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자신이 공무원이 된다면 자신의 부처에서 열심히 일하고 그 성과를 인정받아 고위직에 올라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삶을 살수도 있다. 그리고 본인이 하던 일에서 은퇴를 하고 자신의 경험을 살려서 동네 초등학교에서 교육봉사를 하며 공동체속의 삶을 살수도 있다. 종교단체 등에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제 2 의 인생을 만들 수도 있고 못 가본 여행을 하면서 인생의 2막을 그리는 삶도 있다.

역사 속에서 자신만의 위대한 족적을 남기고자 하는 사람도 결국은 나이가 들고 건강이 나빠지고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기 마련이다. 평생 대통령을 하는 사람도 없고 죽기 직전까지 세계적인 기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위대한 책을 남긴 학자도 책은 남지만 그 사람이 영원히 남을 수는 없다. 시간이 되면 ‘한 때’ 잘 나가던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그 뒤의 삶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역사는 계속 흐른다. 미시적인 사건들과 거대한 사건들이 조합되면서 역사는 부단히 흐른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지 자신의 역할과 배역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다. 1924년 생인 미국의 카터대통령은 본인 재임 시절보다 은퇴이후에 외교특사와 집짓기 운동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업적으로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서사시 속의 배역은 바뀌었지만 역사를 담담하게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왜 공부를 하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다. 만약 역사 속에 남는 성공한 삶을 살기 위해서 공부를 하는 것이라면 나의 목적과 목표에 대해 생각함으로서 공부의 목적을 좀 더 뚜렷이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목적이 인생의 쓰임새와 본질과 관련되어 있다면 목표는 자신이 지향하는 도달지점으로 중간과정이 될 수 있다. 즉 ‘성공’하는 삶이 목적이 되고 그 성공이 다른 이들로부터 ‘인정’받고 그래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의 목적이 된다면 행복과 인정을 가져다주는 성공이라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어떤 성취를 할 것이고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가는 목표가 된다. 그러니까 목표가 바뀌어 중간과정이 변하도 목적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이 처음에 세운 목표를 변경했음에도 자신의 인생에서 목적을 달성하고 성공한 경우들이 많이 있다.

한번 마키아벨리를 생각해보자. 그의 인생은 굴곡이 많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명망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법률가였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는 파산하였고 이로 인해 마키아벨리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을 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으로서 마키아벨리는 불행하다고 느꼈을지 모르지만 독학은 그에게 자유로운 사상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정치에 뜻이 있어 2등서기관에서 시작하여 피렌체의 외교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지배하면서 마키아벨리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이 상황에서 절치부심하여 『군주론』을 집필한다. 이 책을 지배자였던 로렌조 드 메디치에게 헌정함으로서 생계도 해결하고자 했고 기회를 잡아 다시 공직에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정치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어 이태리를 다시 부흥시키고 싶다는 그의 뜻은 명확했다. 자신이 아니라 지도자가 나서서 이태리통일을 이끌고 이후 통일된 이태리를 과거 로마시대의 공화주의가 작동하는 정치체제로 바꾸고 싶다는 의지도 강력했다. 비록 그가 목표로 세우고 되고자했던 정치가와 정치책사로 등용되어 뜻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그의 책은 이후 이태리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전세계인들에게 영감을 주면서 리더십과 권력과 국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1513년 당시 유럽의 군주에 대해서는 누구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 해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한 해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서 책으로 펴냄으로서 해서 이태리통일을 위한 자신의 역할이라는 목적을 넘어서 전세계에 현실주의의 사상을 전파하는 ‘세계적인 교사’이자 ‘정치책사’가 되어있다.

비슷한 예를 한국에서도 찾을 수 있다.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을 다른 사례로 볼 수 있다. 정치에 뜻이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조선말기에 과거 시험에 응시했지만 떨어졌다고 한다. 젊은 이승만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목표를 바꾸어 서양 학문에 뜻을 두고 미국에서 조지 워싱턴대학에서 수학하고 하버드를 거쳐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를 받았고 당시 총장이었던 우드로 윌슨에게서 직접 표창을 받았다. 역사적 격동기를 거쳐 이승만은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되는 과정과 대통령이 된 이후 성과에서 진보와 보수진영간의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리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이야기의 중심은 아니다. 이보다 는 만약 이승만이 당시 체제에 순응하였다면 과연 정치지도자로서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하는 점이다. 그의 목적이 독립된 국가에서 정치를 통해서 공동체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하면 그는 새로운 목표설정으로 그 목적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목적있는 공부로 돌아가 보자. 목적을 가진다는 것은 이처럼 자신의 삶이 지향할 가치와 공동체에서 자신의 쓰임새 혹은 역할과 관련되는 것이다. 목적이 있을 때 목표는 더욱 뚜렷해질 뿐 아니라 목표도 유연해지는 것이다. 모든 직업군에 있는 사람들이 다 자기 직업에 만족을 하면서 살지 않고 직업을 바꾸기도 한다. 이것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목표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목적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만큼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마치 타인의 삶처럼 객관적으로 들여다보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공부는 계속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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