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은 꽤 의미 있는 명제이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라는 아파트 광고 문구도 유사하지만, 그 안에 담긴 차별성이 만만치 않게 커서 입에 올리기가 조심스럽다.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부분도 있지만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은 가벼이 물리칠 수 없다. 작년 6월부터 서울에서 일을 하게 되어 전주에 있는 대학을 휴직하고 내년 9월까지 서울에 상주하게 되었다. 대학에 다닐 때부터 20년은 살았고, 서울 아닌 곳에 있는 대학에서 일하면서도 서울을 자주 들락거렸으니 서울이라는 곳이 낯선 곳도 아니건만, 모처럼 서울이라는 곳에서 생활을 하게 되니 그저 일을 보러 올라왔던 입장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게 새삼 많이 보인다.
서울은 너무나도 자족적인 도시다. 인구도 많고 경제력도 커서 그런지, 서울 사람들의 삶에 필요한 것은 서울에 다 있는 것 같다. 집도 많고, 먹고 입는 것을 파는 곳도 많고 다양하다. 선사 유적도 있고 궁궐도 있다. 명산도 있고 큰 강도 흐른다. 버스나 지하철 등 대중교통은 참 편리하게 설계되어 잘 작동하고 있다. 사람이 많이 사니 일자리도 많다. 주거비용만 빼면 없는 사람 살기에는 오히려 서울이 낫겠다 생각된다. 아직 부족하다 하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이동하기에는 서울이 그래도 제일 낫다. 일하다가 다른 곳에서 열리는 회의 참석하고 친구와 밥 먹기도 편하다. 전주에서 서울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자면 하루가 소요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이런 서울을 서울시의 조례와 대한민국의 법령이 뒷받침한다. 이러한 화려함과 편리함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서울이니까.
그렇다고 서울이 서울만으로 자족적이지는 않다. 도성을 밝히는 전기는 765kV 고압송전선로를 타고 산 넘고 물 건너온다. 서울시민들이 먹고 쓰고 버리는 쓰레기는 서울에서 다 처리하지 못할 양에 이르렀다.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다.
대통령도 국회도 대법원도 헌법재판소도 서울에 있으니 정책이 서울 중심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서울이 대한민국인 것처럼 정책이 입안되고 시행된다. 서울에 불리한 정책은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전기 많이 쓰는 서울에 그렇게 안전하다는 원전을 건설하는 것은 당초부터 고려되지 않는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이라는 자치단체의 운영에 참여하면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기도 쉽다. 국가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 대부분은 서울 사람이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서울이라는 범위를 벗어나 국가 차원에서 생각하기를 기대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서울 중심으로 보는 안목으로는 국가적 사안이 지역에 따라 문제가 어떻게 다양하게 전개되는지 잘 알지 못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서울에서는 양당 또는 3당이 경합하는 경우에도 경상 또는 전라 지역에서는 특정 당이 30여년을 지배해오고 있다. 가끔 무소속 바람이 불어도 대구·경북 지역에서 민주당이, 전라 지역에서 국민의 힘이 바람을 일으킨 적은 없다. 반드시 전국적 규모의 정당이 아니라도 지역적 기반을 둔 지역적 규모의 정당이라도 정당으로 인정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법학을 처음 공부하기 시작할 때부터 상당 기간 동안 국회의원 선거구간 인구불균형의 문제에 대해 왜 선거인의 수와 의원 수가 왜 비례적이지 않은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국회는 땅이 아니라 사람을 대표하는 것인데. 그래서 매우 미시적인 부분에서까지 이러한 비례성을 관철하고자 하는 미국 판례에 환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자치제도가 활성화된 오늘날 “국회의원의 지역대표성은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나 지방의회의원이 가지는 지역대표성으로 상당부분 대체”(헌재 2014. 10. 30. 2012헌마192 등)되었으므로 국회의원 의석과 선거구 인구 사이의 비례성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타당한지는 의문이다. 상원도 없는 마당에.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자치단체의 재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국가 차원의 재원배분을 하는 게 국회 아닌가. 이제 서울과 경기도의 인구가 대한민국 인구의 반을 넘어섰다 하니 의원들 대부분이 이 지역 출신일 국회가 지방과 지방자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궁금하다.
송기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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