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W & JUSTICE] 국제정세와 한국이 나아갈 길(8)-보편적 권리로서의 양심적 병역 거부권 성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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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W & JUSTICE] 국제정세와 한국이 나아갈 길(8)-보편적 권리로서의 양심적 병역 거부권 성립
  • 신희석
  • 승인 2019.03.20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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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석 박사
전환기정의워킹그룹

※ 이 글은 법조매거진 <LAW & JUSTICE>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2018년 6월 28일 헌법재판소의 병역법 제5조 1항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2011헌바379 등)에 이어 11월 1일 대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도 병역법 제88조 1항이 규정하고 있는 입영·소집통지에 불응할 ‘정당한 사유’에 해당한다는 무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2016도10912)을 내렸다. 이에 따라 조만간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제가 도입될 것으로 보인다.

양심적 병역거부는 현대사회에서 합법적 폭력을 독점하는 국가와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누리는 개인 사이의 모순 관계를 극명히 드러내는 민감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최근 여론조사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허용은 꾸준히 지지를 늘려왔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판례 변화도 이러한 여론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국내에서 ‘양심’이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오해만큼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 하는 것은 없어 보인다. 즉, 병역거부가 ‘양심적’이면 병역 의무를 준수한 사람은 ‘비양심적’이냐는 심리적 반발감 때문에 혹자는 처음부터 ‘양심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라 하거나 ‘양심적 병역거부’보다 ‘대체복무제 도입’을 전면에 내세웠으면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쉬웠을 것이라 할 정도이다.

그런데 과거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판례에서도 명시하였듯이 헌법 제19조나 국제인권규범에서의 ‘양심’은 옳고 그름과는 무관하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나 유대교 신자가 돼지고기를, 힌두교도가 소고기를 종교적 이유로 안 먹는다고 해서 돼지고기, 소고기를 먹는 기독교나 불교 신자가 종교적이지 않다고 하진 않는다. 순결 서약을 하는 천주교 사제가 부부 관계를 맺는 개신교 목사보다 더 종교적이라 할 수도 없다.

종교와 마찬가지로 양심은 상대적인 개인 신념의 문제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사상, 양심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에서 유래했다. 16세기 서방 기독교의 신구교 분열 이후, 서유럽은 오늘날의 중동처럼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과 마녀재판이 횡행했다. 그래서 30년 전쟁을 끝낸 베스트팔렌 조약과 같은 평화조약에는 주민의 신앙을 보호하는 규정을 두었고, 각국의 소수종파는 신교든 구교든 법적 보호, 차별 철폐를 주창했다. 계몽사상과 시민혁명의 여파로 식자층은 종교뿐만 아니라 생각, 의견을 이유로 개인을 탄압하거나 차별하는 것을 중세 암흑기의 야만적 악습으로 여기게 되었다.

한편, 기독교는 초기교회 시기부터 ‘살인하지 말라’는 십계명, ‘원수를 사랑하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전쟁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종교개혁 이후 성서의 엄격한 해석을 강조하는 개신교 종파 중에 메노파, 퀘이커 등은 비폭력주의를 고수했다. 이후 비폭력주의는 국제 반전운동의 영향으로 신구교의 여러 종파들뿐만 아니라 비종교인 사이에도 퍼졌다.

그러나 비폭력 신념은 시민혁명 이후 인민주권에 입각하여 세워진 서양의 민족국가들이 채택한 국민개병제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알제리 독립전쟁에서 철수한 후인 1963년에야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했다. 미국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 중 비전투 군복무만을 허용하여 군복무 자체를 거부한 2,000여 명이 투옥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에 들어서야 민간 대체복무가 도입되었다. 심지어 나치 독일은 집총을 거부한 여호와의 증인들을 총살해버렸다.

하지만 나치의 만행은 오히려 전후 동정여론을 불러일으켰다. 나치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려던 서독은 1949년 기본법 제4조 3항에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1956년 개헌으로 징병 조항(제12a조)을 신설하면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를 명시했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보편적 인권으로 발전할 길이 열린 셈이다.

한편, 공산권에서도 소련의 1936년 헌법(스탈린 헌법) 제124조를 필두로 중국의 1954년 헌법 제88조 및 현행 1982년 헌법 36조, 북한의 1948년 헌법 제14조, 1972년 사회주의 헌법 제54조(1992년 ‘수정보충’ 이후 제68조) 등은 종교의 자유를 공민의 기본권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공산 체제하에서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는 용납되기 어려웠다. 나치 과거사 때문에 형식적으로 대체복무제를 도입한 동독에서도 양심적 병역 거부자는 핍박을 받았다.

제3세계 비동맹권에서 사회주의,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은 나라는 개인보다 집단, 국가안보를 강조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부정했다.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인구가 많거나 용병을 고용할 돈이 있는 선진국에 유리하다는 반론도 있었다. 반면에 자유주의,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고 기독교 신자가 많은 나라는 대체 복무제 도입에 전향적이었다.

이러한 국제 구도는 국제인권규범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1년 정부 대표들로 구성된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오스트리아, 칠레, 네덜란드, 뉴질랜드, 우루과이가 세계인권선언 제3조의 생명권과 제18조의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를 인용하여 양심적 병역거부 결의안을 제출했지만 유엔 사무총장의 관련 보고서 제출만이 받아들여졌다.

1978년 유엔 총회는 결의 33/165호에서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집행을 위한 군동원에 대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했지만 일반적 양심적 병역거부권 논의는 유엔에서 답보를 거듭했다.

양심적 병역거부권 인정의 결정적 계기는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으로 시작된 공산권의 자유화였다. 1987년 유엔 인권위는 공산권의 기권 속에 각국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세계인권선언과 정치적시민적 권리규약에 관한 국제규약(자유권규약)상 권리의 정당한 행사로 인정할 것을 호소하는 결의 1987/46호를 채택했다. 뒤이어 1989년 유엔 인권위는 표결 없이 사상 처음으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결의 1989/59호를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구소련 해체 후인 1993년 러시아 헌법은 제59조 3항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를 보장했고, 동유럽 국가들도 민주화 이후에 비로소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유엔인권위원회(2006년 유엔인권이사회로 개편)는 한국이 위원국/이사국으로 있는 동안에도 표결 없이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확대 인정하는 결의안을 계속 채택해왔다.

한편, 한국을 포함한 자유권규약 당사국들이 선출하는 독립 전문가로 구성된 이행감독기관인 자유권위원회(Human Rights Committee)는 당초 1985년 개인진정에 따른 L. T. K. v. Finland 사건(185/1984)에서 자유권규약 제18조 및 제19조(의견을 가질 권리)로부터 양심적 병역거부권은 도출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자유권위원회는 1993년 채택한 일반논평 22호에서 집총의무가 양심의 자유와 종교 또는 신념을 표명할 자유와 충돌하는 한 자유권규약 제18조로부터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11항). 그리고 2006년 윤여범·최명진 사건(1321-1322/2004)과 2010년 오태양 등 11인 사건(1593-1603/2007)부터 자유권규약 제18조 위반을 확인해왔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임명한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의적 구금 실무그룹(Working Group on Arbitrary Detention)도 2018년 8월 20일 결정된 신정인·백승현 사건(의견 40/2018)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국가가 제한할 수 없는 신념을 가질 절대적 자유에 해당됨을 재확인하면서 신체자유의 박탈이 자의적이라 판정했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컨센서스가 2004년 하급심의 첫 양심적 병역거부 무죄 판결 이후 14년만에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전향적 판례에 반영된 것이다. 이는 국제인권법이 국가주권의 핵심으로 여겨지던 병역 문제에까지 국내법상의 변화를 일으킨 역사적 사례이자 인권신장을 위한 국제사회의 시류와 노력에 동참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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