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씹다 불어터진 풍선껌과 죽은 자의 조준사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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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씹다 불어터진 풍선껌과 죽은 자의 조준사격
  • 오시영
  • 승인 2015.04.17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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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필자는 2주 전 본보를 통해 “이 세상사, 살아 있는 한 끝난 것이 아니다. (중략, 분쟁이 계속되는 한) 죽인 자를 죽은 자가 처벌하는 역사의 심판”이 시작된다며 “현재의 분쟁을 새로운 분쟁을 만들어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밝힌 바 있다. 다시 말해 끝나지 않은 것을 끝났다고 우긴들 끝난 것이 아니고, 반대로 끝난 것을 끝나지 않았다고 우긴들 끝난 것은 결국 끝난 것일 뿐이라고도 주장한 바 있다. 성완종 경남기업 대표, 전직 국회의원이 해외자원외교 자금지원과 관련된 수사를 받던 중 자신의 목숨줄을 끊었다. 죽기 전 그가 남긴 인터뷰와 메모 및 다이어리 등 수많은 기록은 “죽은 자가 산 자를 조준사격”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한민국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정조준”하고 있다. 그의 조준사격 앞에 거들먹거리던 자들이 추풍낙엽 신세가 되고 있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일생을 찬란하고 영광스럽게 살아 왔던(?) 자신들의 삶이 한순간 비참한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은 불행한 예감 앞에서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을 듯도 싶다. 하나씩 밝혀지고 있는 진실 앞에서, 그들이 망인의 마지막 구명줄을 단칼에 잘라버렸듯, 그들 역시 그들이 생각하고 있을 모든 구명줄들이 끊기는 통한의 아픔을 맛보게 될 것이다.
 
성완종 회장사건을 접하며 필자는 문득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아주 어렸을 때의 한 친구가 떠 올랐다. 그 친구는 시골에서 전학 온 아이였는데, 친구들에게 사탕이나 과자를 아주 잘 사주었다. 그 아이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집이 아주 부자라고 말했고, 친구들은 그런 줄로 믿었다. 사탕이나 과자를 종종 얻어먹던 친구들은 점점 사탕맛에 익숙해지자 그 아이에게 수시로 사탕을 사달라고 다그쳤고, 그럴 때마다 그 친구는 친구들에게 과자를 사주었고, 사주지 못하면 왕따가 되곤 하였다. 그 친구가 사주는 사탕맛에 익숙해진 다른 친구들의 그 친구 간보기 앞에서 사탕을 사줄 때만 왕따가 되지 않게 된 그 전학 친구는 결국 부모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훔쳤고, 그 사실이 발각되어 아버지로부터 종아리에 회초리를 심하게 맞아 결석하기까지 하였다. 성완종 회장의 죽음 앞에서 왜 갑자기 필자에게 그 잊고 있던 초등학교 친구가 떠올랐을까? 시골에서 전학 와 혹시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그와 같은 선제적 베풂이라는 자학적 손해의 길을 택한 게 아니었을까 싶어 슬퍼진다. 
 
성완종 회장은 죽으면서 억울하다는 말을 주변에 수없이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어쩌면 진짜 억울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자신의 “초라한 외톨이 삶”을 주변에 베풂을 통해 보상받으려했던 심리가 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으로, 가진 것 하나 없이 오직 하나 재주가 있다면 “돈 버는 재주”를 가졌을 뿐인 그가, 자신의 가장 장점인 그 돈 버는 재주로 사업을 일으켜 세우고, 그렇게 사업을 통해 번 돈을 다시 주변에 나눔으로써(법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회삿돈 횡령일수도 있겠지만, 인간적 시각에서 바라보면 아마도 망인은 자신이 번 돈을 자신이 쓰는 것일 뿐이어서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외톨이 삶”을 풍요롭게 가지를 치고 열매를 맺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가져다 바친 돈으로 맺어진 돈맥으로 국회의원까지 되었으나, 다시 선거법 위반으로 전과자가 되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했으니, 그의 인생 몸부림이 얼마나 처절했을지 그 누가 알겠는가? 만일 망인의 메모 내용들이 맞다면 그렇게 덥석덥석 커다란 목돈을 내어 놓을 때 그 돈을 받는 사람들이 순간 굽신거리며 망인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을 것이고(모르겠다, 어쩌면 돈을 받는 이가 네가 주는 돈을 내가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네가 내게 감사해야 한다며 거들먹거렸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한다), 망인은 그것을 보며 “피 같은 내 돈을 받은 너는 나와 피를 나눈 형제지간”이 되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돈을 시도 때도 없이 받아온 자들, 그 검은 수금자(收金者)들은 망인이 수시로 가져다주는 돈을 아주 당연한 듯 받았을 것이다. 어쩌면 먼저 달라고, 더 많이 달라고 요구했을지도 모른다. 허태열 박근혜 대통령 전 비서실장에게 몇 차례에 걸쳐 가져다주었다는 망인의 인터뷰 내용에 의하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하다. 수업시간에 출석 불리듯 이름이 불리면 돈을 가져다주었을 망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무리 돈을 잘 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피땀 흘려 번 돈을 그렇게 주구장창 가져다 바치면서 흡혈귀들에게 피를 뜯기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자신의 자존에 대해 번민하고 회의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자신이 수사를 받는 궁지에 몰려 구원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배신감이 더 크게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강한 힘을 가졌던 사람들, 돈을 받았던 수금자들은 어쩌면 돈을 가져다 바치는 사람을 지렁이 취급도 안 했을지도 모른다. 밟으면 밟힐 뿐이고, 자르면 잘릴 뿐이고, 외면하면 죽은 듯이 쳐박혀 있을 뿐이고, 어쩌다 한 번 웃어주고 작은 시혜를 베풀면 꼬리치며 달려드는 옆집 강아지쯤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망인이 회삿돈으로 부정한 정치자금을 헌납한 사실이 불법적 행위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면서도, 그렇다면 그도 비난받을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불법자금을 당연한 듯 받았을 더 큰 불법행위자들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어떠할까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가져다 바치는 이는 한 배를 탄 동지라고 생각했거나, 가져다주는 것을 형제의 친밀감과 친구의 우정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악마의 수금자들은 말만 하면 돈을 가져다 바치는 아주 만만한 호구쯤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돈이 필요하여 연락하면 언제든지 가져다주는 만만한 사람이 옆에 있으니 얼마나 편하고 좋았을까? 동지와 호구 사이의 차이는 얼마나 극명한가?
 
하지만 그렇게 만만했던 호구 같았던, 지렁이 같았던, 옆집 강아지 같았던 사람이 마지막 던진 승부수 앞에 모두들 벌벌 떨고 있다(하지만 어찌 망인이 호구였고, 지렁이였고, 옆집 강아지였겠는가? 그렇게 착각했던 이들의 어리석임일 뿐이지). 아이러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과녁이다. 모두들 사대에 올라 화살을 쏘는 궁수쯤으로 생각하거나, 스스로를 화살이어서 과녁을 맞추는 우월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빅토르 위고가 자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을 통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아, 이 불쌍한 사람아!” 하며 한탄했던 것처럼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따지고 보면 다 불쌍한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생 모두는 삶이 화살을 쏘면 그 화살을 온 몸으로 맞으며 버티어내야 하는 슬픈 과녁일 뿐이다. 과녁 중 죽은 자의 화살을 맞아야 하는 과녁은 가장 무섭다. 쏜 자가 자신의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과녁을 정조준한 죽은 자의 조준사격 앞에 버틸 자가 누가 있겠는가? 하루가 다르게, 시간이 다르게 앞에 한 거짓말을 또 다른 거짓말로 바꾸며 자신의 곤궁함을 피해보려는 명단 속 수금자들, 이완구 총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우스꽝스러운 익살연기(?)가 국민이라는 관객 앞에 그대로 투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어떤 이는 만난 일이 아예 없다고 딱 잡아떼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만났지만 다른 일을 했을 뿐이라고 잡아뗀다. 하지만 백일하에 드러나는 범죄사실을 어찌 감출 수가 있겠는가?
 
씹다가 벽에 붙여둔 껌딱지도 아닌데 잡아뗀다고 떼어지겠으며, 붙여 놓는다고 다른 사람이 떼어 씹겠는가? 잘근잘근 씹었던 껌딱지가 풍선껌처럼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결국에는 그 공기팽창을 견디지 못하고 펑 하고 터지면서 풍선껌을 키웠던 껌 씹는 이의 입술을 뒤덮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거짓말하지 마라, 속 보인다 속 보여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할 것이다. 하긴 형사소송법상 범죄자는 거짓말을 해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 거짓말은 자기방어권의 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거짓말대로 선고가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증거에 의해 유죄의 선고가 내려지는 것이므로, 거짓말을 하라고 냅두면 된다. 그래 남의 돈을 부정하게 받은 이가 거짓말 좀 더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어디 덧나겠는가? 계속해서 거짓말해라, 거짓말해. 평생을 앞에서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인격자인 양”하면서도 뒤에서는 온갖 못된 짓을 다해 온 그들의 삶을 아마 그들과 검은 커넥션을 맺은 이들만이라도 알겠지.
 
걸레는 빨아도 걸레이다. 어떠한 가정주부도 걸레를 빨아 행주로 쓰거나, 행주를 빨아 걸레로 쓰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냥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걸레일 뿐이고, 걸레가 쓰이는 용도는 행주와는 달리 정해져 있다. 걸레가 그러하듯, 구정물 속의 밥풀떼기처럼 구정물 속에서 샤워를 한들 그 사람이 어디 깨끗해지겠는가? 이명박 대통령 시절, 그 이전에도 그렇겠지만, 정치가와 관료들이 전반적으로 너무 썩어버렸다. 크고 작고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많고 적고의 문제는 있을지언정, 국가의 주요인사들이 너무 타락하고 부패해 버렸다. 같은 새누리당 정권으로 이어지니, 박근혜 대통령이 누구를 데려다 놓은들, 그 나물에 그 밥이고, 더러운 걸레와 더 더러운 걸레의 차이가 있을 뿐 그냥 걸레일 뿐이고 구정물 속의 밥풀떼기일 뿐인 것이다. 참으로 괴로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성완종 망인의 조준사격은 새누리당과 여권 핵심부를 겨누고 있다. 지난 대선자금으로 주었다며 사실상 박근혜 대통령까지 겨냥하고 있는 형국이다.
 
특별수사팀이 꾸려지고 진실을 규명하겠다고 하니, 좌고우면하지 않고 정치권의 눈치보지 않고 공정하고 엄정한 수사에 임하겠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망인의 조준사격과 달리 수많은 유탄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라고 과연 자신들이 걸레 아닌 행주라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오십보백보의 정치집단 아닌가?
 
우리 모두가 과녁이다. 우리 모두가 화살이다. CCTV에 노출되어 있고, 컴퓨터와 핸드폰, 신용카드, 하이패스, 블랙박스, 주변의 사람들 모두에게 우리는 과녁이다. 광야 한 가운데 노출되어 있다. 도무지 어딘지 알지 못하는 데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피할 재간이 없다. 망인은 생전에 300억 원의 장학사업으로 지출하였다고 한다. 자신의 사비를 털어 가난한 학생들을 도와온 그의 맑은 정신과 정치인들에게 불법정치자금을 가져다 바친 어두운 정신 사이에서, 그의 이중적 심리상태를 이해할 듯 하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 이해되지 않은 듯 하면서도 이해가 된다. 근본이 “초라한 외톨이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그의 내면세계가 들여다보이기 때문이다. 죽은 자에게 누가 돌을 던지겠는가? 망인의 명복을 빈다. 그의 죽음이 정조준한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부정부패가 일망타진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썩은 정치, 걸레 같은 정치인들이 이번 기회에 대폭 솎아지기를 바란다. 거짓말쟁이 이완구 총리가 국회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해 국무총리가 되지 않았다면 어쩌면 오늘과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역사는 참 재미있다. 준엄하다. 
 
“죽인 자를 죽은 자가 처벌하는 역사의 심판”을 통해 수면 아래에 감추어져 있던 정치의 진실들이 인양되기를 바란다. 서해바다 속에 수장되어 버린 세월호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란다(세월호 1주기 피해자들을 추념한다). 걸레는 물러가라! 너, 떨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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