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의 일기] 친구에게
상태바
[고시생의 일기] 친구에게
  • 법률저널
  • 승인 2002.11.06 15: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병태

사법시험 준비, 서울대 박사 과정수료

 

친구야! 공부하느라 힘들지? 시험 날짜는 다가오는데 모의고사 점수는 만족스럽게 나오지 않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은 있는데 자리에 앉으면 눈이 감기고 집중도 잘 안되어서 계획만큼 안 되지 않니?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하긴, 나같이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기 좋아하고 사람들과의 술자리와 대화를 즐기는 놈이 이런 계절에 독서실에 앉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이긴 하다. 날이 차가와 질수록 표정이 어두운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갈거다. 나도 작년 겨울 불합격을 예감하고선 소화와 생리작용이 제대로 되지 않았고, 3년 가까이 끊었던 담배도 다시 피게 되었단다. 선배 중의 한 분은 아예 밥을 먹지 못해서 점심 때 집에서 가져온 죽을 먹고 계시더라. 그래도 공부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이 공부밖에 없다는 것은 행복한 말 일거다. 조금만 깊이 얘기해보면 아픔을 하나둘씩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더구나.

 

늘 밝아만 보이는 우리 고시원의 전(前)총무도 집안에서 돈이 끊긴 후, 고시공부를 접고 취직한 사람에게서 매달 조금씩 지원을 받고 있는데 부담이 많이 되는 모양이더라. 내 고등학교 친구 중 하나는 올해 시험을 쳐 놓고 매일 아침 우유와 신문을 한꺼번에 배달하더라.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도 들 텐데 말이다. 돈과 가족, 고시생인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지. 경제적 여유를 가지고 온 집안의 격려와 지원을 받고 해도 어려운 시험인데, 공부가 길어지면서 아버지와 멀어진 친구나 부인과 아이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선배는 참 힘들거야. 자신의 공부와 상관없는 가족들간의 갈등으로 집중을 하지 못하는 후배도 봤다.  작년에 같이 '밥터디'하던 내 친구는 결혼 약속까지 했던 애인을 외국으로 보낸 후, 한동안 밥을 제대로 못 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 달 동안 나도 힘들었다. 

 

하긴 세상살이가 쉽지 않은 것이 어디 고시생들 뿐이겠니. 그건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 지위나 조건하고도 상관이 없는 것 같다. 서울대교수면 뭐가 부럽겠냐 싶지만, 교수님 중에서는 늘 어두운 얼굴로 지내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남편이 고층 건물 유리창닦이를 하고 부인은 집에서 살림하며 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는 우리 빌라의 아랫집은 참 행복해 보인다. 영화 아이 앰 샘 에는 평생 7세의 지능으로 살아가는 샘(Sam)이 자신의 무능으로 딸의 양육권을 재판에서 뺏긴 후에 항소를 포기하면서 변호사에게 "정상인인 당신들이 내 고통을 아느냐?"고 절규하는 장면이 있다. 그 때 그의 변호사는 "남들은 올망졸망 잘만 살아가는데 내 결혼은 파탄났고, 아이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맞받는다. 자기도 샘만큼 힘들다는 거다. 그러고 보면 각자 자기 나름의 아픔이 있는 것이고, 또 지금 마구 행복해 하는 사람도 그 행복이 일순간 고통으로 바뀔 가능성이란 것이 늘 있는 것 같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잃기도 쉽고, 학문이나 고시처럼 성취감이 큰 영역일수록 상처받을 가능성도 큰 것 같다.

 

하늘은 스스로 극복하지 못할 만큼의 시련은 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도 깊은 슬픔이 밀려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찾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거다. 그런데 니체는 신(神)이나 다른 절대적인 것에 의지하기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강하게 맞서라고 한다.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라고 한다. 100년 후에 오늘과 똑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똑같이 살만큼 오늘을 열심히 살라고 한다. 영화 바닐라 스카이 의 탐 크루스는 자신이 죽어 냉동인간이 되었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꾸며진 '가상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그것을 버리고 교통사고로 추해진 얼굴과 실연의 아픔이 있는 '현실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기계가 주는 전기적 자극이 아무리 달콤해도 현실에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아픔과 고통을 맛보겠다는 거다. 물론 우리 모두가 니체의 초인(超人)이 되어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자기가 마음이 약해지면 아무리 작은 일에도 핑계를 찾게 된다. 자신이 강하다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고시공부 또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로 하는 것 같다.

 

나도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 줄 입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장남이면서 제대로 된 직장에서 받은 월급으로 따뜻한 내의(內衣) 한 벌 사드리지 못했고, 어머님은 지금도 교통사고로 불편한 다리를 이끌고 몸을 써야 하는 일을 하고 계신다. 그래도 내가 늘 싱글거릴 수 있는 것은 내 처와 우리 아이들 덕분이겠지만, 내가 나 자신을 무척 사랑해서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은 것처럼 나는 나 자신의 웃는 얼굴이 늘 보고 싶다. 물론 나도 어쩔 수 없는 고시생인지라 시험 점수가 작년보다 조금 나아진 것이 큰 힘이 되기는 한다. 그러니까 고시생인 우리들에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나, 숨이 막힐 만큼 가슴을 짓누르는 인생의 무게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뾰족한 수는 없다. 그저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고 자신의 실력이 조금씩 늘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수밖에 .

 

네 아픔의 깊이를 모르고 철없는 얘기만 늘어놓았다면 미안하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건네면서 힘들어하던 너였기에 너의 노력과 의지로 웃고 살아가는 네 모습을 보게 되면 나도 기쁠 것 같다. 네가 무엇을 하든 너를  아끼는 사람들이 너와 마음으로나마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그리고 공부하는 동안 혹시 내가 힘들어지면 네가 위로해 주렴. 우리 더 열심히 해서 1, 2차 한꺼번에 끝내 버리자. 파이팅 내 친구!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