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자 시인의 잉크(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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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자 시인의 잉크(14)
  • 법률저널
  • 승인 2009.02.27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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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식레코드(Akashic Records:우주도서관)에서 찾아보고 싶은 추억-2  
                                                    

오늘은, 아! 집과 마음이 비었다. 어쩌다 집이 텅 비는 경우 과체중을 벗고 4차원세계로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전후좌우상하는 물론 시간까지 자유자재로 늘이고 압축하며 내 손으로 클라인씨병(甁)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정말<정말, 모처럼<모처럼  밀린 원고도 모임도 없다. 그 집, 그 자리건만 호홀지간(毫忽之間)에 공간이동/시간이동이 가능해졌다. 이 넓맑고 깊고 둥글고 푸른 시간을 어찌 자축해야 할까. 우선 도자기로 된 긴-직사각형 모반에 물 세 컵을 준비했다.


첫 번째는 커피, 두 번째는 찻잎을 넣고 끓인 음료수, 세 번째는 맹물이다. 이만하면 OK! 충분히 화려하다. 베란다 유리창을 무사통과하는 햇살, 색깔과 맛이 각기 다른 석 잔의 물. 그리고 건강한 컴퓨터와 나. 이렇게 호사로운 시간 속에서 행복했던 과거를 느긋이 감촉한다는 것은 신으로부터 받은 최상의 보너스다. 이럴 땐 올올이 정화된 정서가 전두엽을 평정한다. 찌그러졌던 현실이 용서되고 이해되며 하찮은 일상마저 소중하게 느껴진다. 이런 날 다시 살아보고 싶은 추억 속, 한 장면으로의 여행은 자신이 자기에게 부여하는 궁극적 위안이자 켜켜이 쌓인 피로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행복했던 몇 순간이 기억파트에 보관되어 있다면 그것은 미래영역에 걸어놓은 꿈 이상의 재산이며 등불이다. 그리고 그 재산과 등불은 우리의 뒤편에서 우리가 휘청거릴 때마다 조용조용 응원한다. (헉, 어느새 커피잔이 바닥을 보인다.) 내 인생에서의 행복타임은 언제였을까? 오늘, 우주도서관의 열람예약목록은 약 35년 전 1월 첫눈 내리던 날의 석양녘이다. 

 

밤새도록 배가 아팠다. 전날 전전날 전전전날도 그랬다. 초산의 진통이 나흘간이나 지속되었던 것이다. 추호라도 태아에게 해로울까싶어 분만촉진제를 사양한 나는 난생처음 자기와의 사투에 자원입대했던 셈이다. 그러나 나흘째 새벽이 되어도 분만은커녕 허리와 배가 끊어지도록 뒤틀릴 뿐이었다. 기진맥진한 나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09시를 기점으로 백기를 들겠다고, 제왕절개수술을 받겠다고 의사를 표명했다. 그때 친정어머니의 애간장을 녹인 불효야말로 가부득감부득이었다.  


그런데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어미 몸에 칼 대는 걸 막으려 했음일까. 진통간격을 급속히 좁히고 좁힌 아기가 정각 09시에 고고성(呱呱聲)을 들려주었다.  “아들이에요. 아기가 태를 목에 걸고 나왔어요. 잘 참으셨습니다.” 의사의 말 한마디에 유별난 진통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어미가 상상초월지경으로 신음할 때 아기는 또 얼마나 힘들었으랴. 목에 걸린 탯줄이 잘못 조여지기라도 했다면 어찌 되었을 것인가. 결국 자력으로 태어난 아기는 4㎏의 건강한 별이요 꽃송이였다.   

   
생명의 빛이란 그런 것일까. 방금 전까지 요동쳤던 진통 따위는 우주 밖으로 날아갔다. 아기는 열 달 동안 불러오던 배보다도 더 둥글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충만을 안겨주었다. 아기와 나는 우주공간에서 도킹한 두 사람이었다. 아니, 아기는 또 하나의 나-나 자신이었다. 아기와 나는 나란히 누워 지상에서의 달콤한 첫잠을 잤다. 그리고 그 잠에서 깨어나 바라보는 세상은 어제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쳤던 풀 한 포기, 병아리 한 마리, 돌 한 점에도 애틋한 모성이 입혀졌다.

 

(헐, 이번엔 찻잎을 넣고 끓인 음료수 컵이 비었다.) 아직도 나는 빈집의 고요와 햇빛을 단독으로 즐기고 있다. 두어 번 전화가 걸려왔지만 그 정도의 소통은 신통하고 시원하다. 전화 받느라 내려놓았던 문맥을 첫머리부터 다시 뜯어보게 되고, 다음 문장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얻기도 한다. 환기란 어느 곳에서나 산소의 공급원이니 말이다. 부러울 것 없는 이 공기 속에서 지구와 지구의(地球儀)를 떠올려본다. 나는 ‘잠시 지구표면을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상상하면 무겁기만 했던 삶이 문득 투명하고 고귀하게 느껴진다. 한시적으로 지구의에 붙었다가 떨어져나가는 먼지; 그게 바로 인명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이 행성을 떠나게 된다면…, 영영 지표를 밟을 수도 바라볼 수도 감촉할 수도 없게 된다면…식의 모의관념 앞에서 나는 한결 부드러워진 자신을 만난다. 평소 돈 한 푼 들이지 않고도 마음껏 바라볼 수 있는 하늘이며 숲이며 바람과 구름, 정다웠던 사람은 물론이요 나를 찍었던 인간까지도 오선 위의 구슬이나 메아리로 환원된다.  


하물며 자식이랴. 희망과 기쁨, 감사와 보람, 믿음과 사랑 등등 온갖 긍정어를 다 동원해도 모자랄 만큼 벅차게 안겨왔던 첫 출산의 기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아기의 배냇짓과 말 배우던 때의 어둔한 발음, 겨우겨우 의자를 붙잡고 일어서기를 할 때의 몸짓…. 어느 한구석 신기하고 예쁘지 않은 데라곤 없었다. 아기가 가져온 행복이 그토록 커다랗고 완벽한 덕(德)이리라고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1973~1974년 사이의 그 겨울 첫눈은 매우 늦었다. 때맞춰 날아든 환호였을까?          

  

기쁨만이 오롯한 석양 무렵. 아기를 감싸 안은 친정어머니와 동생과 나는 오라버니가 불러온 택시를 탔다. 익산시내에서 7~8㎞나 떨어진 본가를 향해 달릴 때, 만경강은 도도히 흘렀고 전군도로는 구김살 없는 실크였으며 도열한 가로수는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득손(得孫)을 흐뭇해하시던 어머니와 이모가 된 동생의 감탄이 내 행복감을 하늘까지 높여주었다. 참, 남편은 직업군인이었으므로 아기와 상면한 뒤 곧바로 귀대했었다. 사거리 방앗간 앞에서 내린 우리는 마을로접어들었다. 어머니는 아기를 좀더 폭 싸안았고 동생은 나를 부축했다. 논둑과 밭두둑을 지나 우리 집이 보이는 잔둥에 올라서는 순간 두어 뼘 남은 태양빛을 배경으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생이 탄성을 질렀다. “언니, 첫눈이야! 첫눈!!” (큭, 유리컵 속에 남은  생수가 1/3.) 몇 개의 돌계단을 밟고 마당에 내려서자 낮부터 장작불로 아랫목을 데워 놓은 아버지가 서둘러 방문을 열어주셨다. 새하얀 홑청의 솜이불을 덮고 아기와 나는 지상에서의 먼먼 여행을 예비하였다.


그날 그 잔둥 그 석양이 나에게는 다시 살아보고 싶은 또 하나의 그림이다. 불행이라곤 몰랐던 때, 삶을 의심하지 않았던 때, 희망을 신뢰했던 때…. 그때 그 한 컷이야말로 내 생애 순수의 정점이었고 집합이었으며 결정이었다. 그렇게나 따뜻한 그림이었기에 여태 퇴색하지 않고 속내를 어루만져주었으리라. 중심을 지킨다는 것. 인내한다는 것. 인생에서의 진진한 고통과 행복, 불행과 고독은 가정 안에 내재한다는 사실을 그날 그 저녁 부모님 슬하에선 전혀 몰랐던 것이다.

 

에필로그) 인생을 건너와서야 인생을 안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태어나지 않은 사람만이 출혈하지 않는다. 내 일찍이 자식 사랑의 진수를 깨달았다면 자식을 낳지 않았을 것이다.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라고 툭하니 맨몸으로 내던졌단 말인가. 돌이켜보건대 나의 출산은 자식을 위한 게 아니라 순전히 나 자신을 위함이었다. 온 인류가 그렇게 해왔으므로, 나도 아들딸이 있어야 하므로 낳았던 것이다. 그런데 왜? 왜? 그날의 정경을 이토록 간절히 회상한단 말인가.


모순이란 이런 것인가. 어디를 딛어도 비탈뿐인 지표에 붙어 비척비척 출렁거리는 걸음이면서 한 뼘의 여유가 주어지자 황홀해한단 말인가. 삶이란 단 한 획도 미리 공개되지 않는 극비문서이니 예기치 못한 현실에 부딪히고 적응할 수밖에 없다. 그날의 은총이었던 내 첫아기는 지금 30대 중반을 넘어선 가장으로서 열심히 살고 있다. 며칠 전 아들의 전화가 왔다.  “내일이 제 생일이에요. 엄마 고생하셨어요.” “아니다. 미안하다. 도와줄 수도 없으면서, 널 낳아서 미안하구나.”   


감탄사를 하나 더 추가해야겠다. ‘아! 아! 모처럼 집과 마음이 비어’ 망중한을 누렸다. 조카 현희가 손수 만들어준 긴-직사각형 도자쟁반도 십여 년 만에 쓰다듬어보았다. 부모님은 이미 이 땅에 아니 계시고, 당시 대학생이던 동생도 50을 훌쩍 넘었다. (흠, 네 번째 생수 컵을 나란히 세웠다.) 짤막짤막 주어지는 틈새 빛으로 우리는 거덜 난 힘을 충전하고 고뇌를 수용하며 다음의 고비 또한 넘겨야 한다. 안전지대에 보관된 내 행복이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안녕, 안녕히-.

 

정숙자 시인은 1952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했다. 1992년 동국대 교육대학원 철학과를 수료했으며, 1997년 대산재단 창작지원금 수혜를 받았다.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08년 들소리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열매보다 강한 잎>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밝은음자리표>가 2008년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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