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에세이(92)-‘아팠지만, 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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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에세이(92)-‘아팠지만, 배운’
  • 안혜성 기자
  • 승인 2024.06.07 11:2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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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행 변호사시험법은 로스쿨 수료 후 5년간 5회로 변호사시험 응시 기회를 제한하고 있으며 이는 로스쿨에 재입학해 수료를 해도 다시 응시 기회를 부여받지 못하는 절대적 응시 금지로 해석되고 있다. 이에 따라 소위 오탈자들은 10년 여의 시간 동안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투자하고도 법조인의 꿈을 포기해야 하는 고통을 겪고 있다. 

이에 사랑샘재단(이사장 오윤덕)은 제도의 사각에 놓인 오탈자들의 고통을 위로하고 응원하고자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프로젝트’를 마련했다.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면 200만원의 마중물 지원금이 지급되며 지원금은 여행, 새로운 진로를 위한 공부를 비롯한 다양한 경험과 활동 등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지원 대상자는 스스로에게 새로운 약속이 되고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도전을 결심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 있도록 프로젝트를 통해 얻은 경험과 사색 등을 담은 에세이 1편을 1개월 내에 사랑샘재단에 제출하면 된다. 에세이의 형식이나 길이에는 아무런 제한이 없으며 익명으로도 참여가 가능하다. 

지원금 신청 시에는 ①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프로젝트 참여 동기 또는 계획의 요지를 기재한 신청서 1통(사랑샘재단 홈페이지 소정양식) ② 로스쿨 석사 학위증 등 변호사시험 평생응시금지 해당자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 ③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 사본 ④ 온라인 송금 수령 계좌번호 ⑤ 에세이가 익명으로 발표되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이를 사전에 신청서에 기재해야 한다. 

사랑샘재단의 ‘새로운 꿈을 긷는 마중물’ 프로젝트에 관해 문의사항이나 관심이 있는 이들은 이메일 ydoh-law@hanmail.net, 전화 02-3474-5300으로 연락을 하면 된다. -편집자 주

<아팠지만, 배운>

유들레(필명)

1. 입학과 공황

저는 원래 회사 생활을 했었습니다. 회사에서 법무를 담당하다 보니 전문성을 갖출 필요가 느껴졌고, 시험 삼아 봤던 법학적성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로스쿨에 입학했습니다.

갓 서른이 된 젊은 나이였지만, 당시의 저는 모든 것이 늦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혼도 늦어지고, 잘하고 있던 사회생활도 최소 3년 뒤 정도로 미뤄지는 것이니 조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어린 나이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늦었다고 생각했는지 아쉬운 부분입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쌓였던 독이 그때 올라왔던 것일까요, 아니면 부담감이 문제가 됐던 것일까요, 이것도 아니면 모든 원인이 복합적이었던 것일까요, 로스쿨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에게 문제가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죽을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응급실에 실려 가게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진단받은 내용은 제가 공황장애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얘기만 들었지 제가 겪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당황스럽고 앞으로가 걱정되긴 했지만, 당장에 저에게 닥쳐오는 공포가 더욱 힘들었습니다.

모든 일상이 무너졌습니다. 밖에 나가기도 어렵고, 심지어 학교로 가는 버스에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웅크려 있었습니다. 우울증약, 항불안제, 수면제 등을 먹으면서 일상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학교 수업 중에는 중간에 뛰쳐나가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2. 갈림길 1

많은 시간을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1학년 1학기 성적이 나왔습니다. 중간 이상 정도의 성적을 받았고 공황이 나아지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좋은 성적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쭉 가면 아마 합격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쪽에는 일상생활이 어려운 느낌이 들어 휴학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이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하루에 10시간을 해도 모자란다고 하는 공부를 한두 시간하고 공황장애를 겪고 지친 몸으로 다시 하고를 반복하는 것이 비효율적일뿐더러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런 고민들을 가족과 정신과 선생님, 애인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나는 네가 이런 것들을 충분히 이겨낼 거라고 믿어.”
“이런 것도 못 이기는 사람이 아닐 거야.”
“정신력이 강하니깐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야.”
“밖에 비가 오니 약을 우산이라고 생각하고 쓰고 버티면 됩니다.”

참 따뜻하고 좋은 말이고, 저도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저를 포함한 모두가 병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누구를 탓할 것은 아니지만, 공황이 한창 심할 때는 이런 말들을 했던 분들에게 원망도 느끼고,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도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선택은 제가 한 것이고, 그 선택의 가장 큰 이유는 제가 저의 상태를 정확하게 몰랐기 때문이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금방 낫겠지’ 하는 생각 말이죠.

이때가 ‘병의 치료에 먼저 집중했으면 어떻게 됐었을까’ 아쉬워지는 첫 번째 갈림길이었던 같습니다.

아프면 먼저 병부터 고치고, 그다음에 공부하는 것이 더 빠른 것이고, 더 중요하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몰랐고, 무엇보다 이미 늦었는데 더 늦을 수 없다는 생각, 모든 것을 한꺼번에 이루려는 욕심이 제 발목을 잡았습니다.

7~8년이 흐른 뒤에 돌이켜 보면 전혀 늦은 것이 아니었거든요. 다섯 번 떨어질 수도 있는 것인데, 한두 해 늦어지는 것이 뭐가 대수일까요. 그때는 떨어지는 사람이 내가 될 줄 모르는 것이니 이러한 선택지가 눈에 보일 수가 없지요.

3. 또 다른 병

약을 다른 종류를 써보고, 수면제를 끊어보는 등 여러 시도를 하면서 어찌어찌 공황이 관리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출 훈련을 통해 차도 탈 수 있게 됐고 조금씩 공부도 할 수 있게 됐었거든요.

1학년 때 하루에 한두 번 공황발작이 일어나고, 거의 계속해서 공황발작이 올지도 모른다는 예기불안이 있었지만, 겉으로 보기에 일상생활을 하고 있으니, 저도 이 정도면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학교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런 상태로 3학년이 되고 첫 졸업시험을 치르고 나서 몸에 이상 반응이 나왔습니다. 갑자기 혈뇨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몸도 너무 안 좋고 이상해서 병원을 찾아갔더니 원인을 알 수 없는 간염에 걸렸다고 하고, 각종 특수 검사, 초음파 등을 진행했지만 특별한 원인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독한 약을 매일 먹고 있었으니 그럴 수 있었다고 지금은 생각이 듭니다. 간 수치가 너무 높아 병원에서는 공부고 자시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누워만 있으라고 했었습니다. 물론 의사 선생님이시니까 심하게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하지만 계속 무리하면 더 큰 일이 날 수도 있다고 해서 무섭기도 했습니다.

첫 시험이 다가오고 있는데, 생활은 완전히 무너졌었습니다. 공부가 아니라 한 시간 정도 생활을 하면 세 시간을 누워있어야 하는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생활을 2달 정도를 하고 나니 몸은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고, 운이 좋은 것인지 6월에 졸업시험을 통과하게 돼서 첫 변호사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4. 시험 탈락 후 재시 생활, 병을 낫게 하려는 여러 시도

어떻게 치른 것인지 시험 중간에도 공황발작이 오긴 했지만, 시험은 다 치를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공황이 오고, 그 시간을 버틴 다음에 다시 시험을 치러야 했기에 통백은 아니더라도 중간중간 미진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몰라서 못 푼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탈락의 고배는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첫 탈락 후 감정적으로 힘들어지니 공황장애 증상도 더욱 심해졌습니다. 공황장애 증상이 계속해서 있으니 서울에서 학원 생활을 한다는 것은 너무 두려웠고, 본가에서 지내게 됐습니다. 그렇게 본가에서의 재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4번째 시험을 볼 때까지는 병이 낫는데 도움이 안 된 것으로 드러난 여러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온갖 걱정과 스트레스가 많은 것이 원인일 테니, 반복 작업 같은 소일거리, 취미생활들을 해보면서 휴일을 보냈습니다. 손이 바쁜 목공 같은 것도 해보고, 낚시를 하면 머리가 비워질까 같은 것들이요.

스트레스 수치가 낮아지니 공황장애 증상은 호전이 되었습니다.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들은 시간이 너무 많이 들고, 근본적인 원인 해결은 아닌 도피성 미봉책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울증을 겪는 많은 분이 게임만 하거나, TV만 보거나, 누워만 있거나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러한 시간이 없으면 일상이 긴 수험 생활을 잘 버텼을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어떻게든 버티려는 마음과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이해는 되지만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리고 4번째 시험을 볼 때까지는 비슷했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고, 병원을 바꿔보고, 공부하면서 공황 겪고, 버티고, 무너지고, 하는 일상이었습니다. 코로나 기간에는 여러 걱정과 염려 같은 것으로 증세가 더 심해지기는 했었습니다.

그래도 나중에는 하루에 한두 번 정도로 증상이 줄다 보니 이제는 공부만 조금 더 하면 될 것 같다는 희망의 끈은 놓지 못했습니다.

5. 마지막 수험 생활

병원을 바꾸고 나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는데, 저는 병을 고치기 위한 정신과적 치료를 제대로 받고 있지 않았습니다. 약만 쓰고 있었으니 병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심리적 문제나 인지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더군요,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이라는 점과 어느 정도 관리가 되는 상황, 조금만 더 버티고 해보자는 저의 욕심, 환자가 많아 바쁜 병원과 같은 것들이, 치료를 하지 않던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의사 선생님의 권유를 받아 제 병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1년 동안 진행했습니다. 과거의 어떠한 점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는지, 어떠한 흉터를 남겼는지, 그것을 어떻게 치유하고 회피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매주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지난 과거들을 집요하게 돌이켜보는 과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을 진정으로 솔직하게 바라본다는 것을 처음으로 해본 것 같고, 이러한 과정이 저를 알게 됨과 동시에 직시를 통한 고통과 자기혐오를 가져다줬습니다. 병원을 다녀오면 마음은 물론 몸까지 녹초가 되어서 돌아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치료에 더해서, 제 몸의 역치를 높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제 병을 많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 편이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만큼 많이 듣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 중 나았다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몇몇의 나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운동을 ‘숨이 터질 때까지’ 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시험을 치르기 1년 전부터 꾸준히 해오던 헬스와 같은 운동이 아닌, 뛰는 운동을 하기로 했습니다. 명상을 위해 요가도 병행했습니다.

처음에 뛰는 운동을 했을 때 심장이 빨리 뛰는 느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공황의 공포는 익숙해질 만도 한데, 생각이나 이런 것으로 느끼는 것이 아닌 척수, 온몸에서 느끼는 공포라 언제나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진짜로 죽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럴 때마다 머릿속으로 죽지 않는다, 이 느낌은 가짜라고 생각을 하지만, 몸은 제 마음과는 항상 다르게 반응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심장이 격하게 뛰는 운동을 시도한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참 용기 있었고 대견하긴 합니다.

오랜 수험 생활로 인해 체력도 안 좋은 상태라 처음에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멈춰있는 돌을 굴리는 것처럼 꿈쩍도 안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시험을 치르면서 한 번이라도 공황증세가 없는 상태에서 건강하게 공부해 보고 싶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생겼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실제로 토를 할 때까지 뛰고, 나머지 시간은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명상이나 요가를 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6. 갈림길 2

이렇게 생활을 한 지 4~5개월 지난 여름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운동하고 독서실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지난 일주일 정도 제가 공황장애 걱정을 안 하고 있었습니다. 7~8년 동안 항상 머리와 몸속에 달고 살던 공포감이 사라진 상태라는 것을 깨달으니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동안 제가 생각한 행복한 느낌이라는 것은 원하던 것을 이뤘을 때, 무언가 원하던 물건을 샀을 때와 같은 것들이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상태, 보통의 상태라는 것이 제게 큰 행복으로 다가왔습니다. 희망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쯤에 제가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 또한 느껴졌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운동하면 나아질 수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 이 정도의 시간을 운동에 투자한다면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시험에는 결국 떨어질 것이라는 확신.

결과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알다시피 저는 병을 고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렇다고 공부를 안 한 것은 아니고요, 지난 세월 동안과 비교해 보면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라, 공황장애 증상은 계속해서 있었고 많은 부분이 호전되었다는 것만 달랐습니다.

그리고 시험 전 두 달 정도는 공부만을 계속했었고, 그런 것이 또 원인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마지막 시험을 치르면서도 중간에 공황은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떨어질지 붙을지는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시험을 다 치르고 나서는 낫는 것에만 집중했습니다. 독한 약을 오랜 기간 먹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말하기 어려운 많은 부작용도 겪었는데, 그런 것들 또한 극복하고 싶었기 때문에 약도 끊고 운동과 치료에만 전념하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약성 성분을 끊음에서 오는 금단증상이 저를 몇 달간 괴롭혔고, 약을 안 먹음으로 인해서 다시 찾아오는 공포감과 불안감, 약에 대한 의존성들이 한꺼번에 찾아왔습니다.

그 기간을 모두 겪고 나서는 결국 도대체 지난 세월을 어떻게 살았던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건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시험에는 떨어졌습니다.

7. 시험 이후, 그리고 전하고 싶은 말

시험에 떨어진 이후, 많은 감정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후련하기도 했고, 아쉽기도 했고, 서럽기도 했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바로 한꺼번에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불현듯 문득문득 저를 찾아오면서 힘들게 하더군요, 지난 세월에 대한 아까움, 아쉬움. 그런데도 고통 속에서 얻은 것들, 힘든 시험에 떨어져서 잃어버린 자신감과 힘든 병을 극복해서 다른 방식으로 찾은 자신감들이 저를 괴롭히다가도 위로해 주고는 합니다.

법 공부를 오래 했으니 이런 쪽을 살려서 취직하려고 알아보았고,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인지 운 좋게도 같이 일을 하자는 분들이 몇 분 계셔서 지금은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법률 관련 일이 아니다 보니, 법적 지식이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논리적인 사고방식의 틀을 배웠다는 점에서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위안 삼고 있습니다.

우울함에 빠져서 누워 있다 보면 모든 것이 더 안 좋아졌었고, 그런 것들로 인해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 낫기 위해 밖으로 나와서 뛰었던 것이 병을 낫게 해줬고, 그리고 지금 일을 하면서도 행동을 하는 것이 많은 가능성을 열어 준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공부를 하면서 힘들어할 로스쿨생들, 변시생들, 그리고 다른 시험을 준비하면서 우울에 빠져 있을 분들도 어떤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나을 수 있는 병이라는 것과 운동이 많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기회가 있었지만, 병으로 인해 시험을 제대로 못 친 것이 제일 아쉽고 억울합니다. 제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요, 그리고 저보다 더 힘든 병들을 겪고도 시험에 붙으신 분들이 있고, 더 힘든 병들로 인해 시험을 못 치르시고 헌법재판소까지 찾으셨지만 안 되신 분들의 사례가 있어 제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맞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다만 지금의 제도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의심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시기를 제한한다는 것이 옳은 것인지, 예외의 폭이 좁다는 것에 대한 것들 말이죠.

저는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만약에라도 오탈 제도가 없어진다면 그때는 딱 1~2년이라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으며 재정적, 신체적 준비를 하고 있으려고 합니다. 지금 새로운 일을 하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배우고 다른 꿈을 품는 것도 충분히 좋은 삶이지만, 단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된 기회가 있었으면 다를까 하는 궁금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안 된다면 안 되는 것이겠죠.

마지막으로 병을 겪고 이겨내면서 전에는 배우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어서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만약에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바로 변호사가 되었다면, 저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요, 원하는 것을 바로바로 이루는 멋진 삶이기도 했겠지만 그만큼 오만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도움과 환경이 어우러져 된 것이 아니라 제가 다 맞았다고 생각을 할 수도 있고요, 다른 이의 실패를 돌보지 않았을 수도 있고요, 그렇게 해서 쉽게 내뱉은 말이나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쉽게 상처를 줄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타인의 아픔을 돌아볼 줄 아는 따뜻한 사람이 되었으면, 굽이굽이 돌아가는 만큼 맑고 깊어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상처를 동력으로 삼아 멋지게 살고 삶을 사랑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리고, 이 과정을 돌아 볼 수 있게 도움 주신 재단법인 사랑샘의 오윤덕 변호사님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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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건 2024-06-07 20:11:17
오탈자들의 수기중 가장 인상깊은 글이었습니다
오탈자 제한이 풀려서 다시 한번 도전하시기를
기원하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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