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의 부활은 실화를 바탕으로 작성한 소설이다. 그는 한 편의 소설 부활을 작성하기 위해 소송기록을 읽고 근 10여 년의 시간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이 참가한 재판은 충격의 재판 현장이었다. 배심원으로 참가한 대지주 네흘류도프. 지금 그의 눈앞에 첫사랑 카튜사가 독살 혐의로 서 있다. 그녀의 신분은 유곽에서 몸 파는 여인. 주인공은 군 입대와 함께 향락에 빠져 그녀와의 결혼 약속을 잊어버린다. 배심원들은 코냑에 탄 것은 수면제로 알았다는 카튜사의 말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재판으로 피로해진 탓에 평결 기록에 ‘살해 의도 없었음’을 기록하는 것을 잊는다. 중형 언도와 함께 그녀는 투옥된다.
주인공은 무엇이 그녀를 죄인으로 만든 것인지 탐색하기로 결심한다. 그녀를 살려야 한다. 아리땁고 순수했던 카튜사의 옛 모습을 다시 찾아야 한다. 카튜사를 찾아가 사죄하고 그녀의 누명을 벗긴 후 결혼을 약속한다. 그러나 차가운 카튜사. 교도소의 모습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그들은 굶주림, 법의 무지, 오심의 희생자들이었다. 가난이 범죄자를 양성한 것이다. 법은 가난한 자를 보호해 주지 않았다. 순간 주인공의 머리에 헨리 조지의 논문이 떠오른다. 논문은 신명기 말씀대로 인간은 땅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채무의식을 느낀 주인공은 농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준다.
주인공은 두 번의 망각을 속죄하고 싶었다. 카튜사를 잊은 것과 평결서에 무죄를 기록하지 않은 일. 혼신을 기울여 항소했지만 기각된다. 그리고 카튜사와 함께 시베리아행 기차를 탄다. 네흘류도프의 도움으로 그녀의 영혼은 변화되었지만, 카투사가 결혼의 손을 내민 상대는 시몬스였다. 그는 가난과 소외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극적인 소식. 카튜사의 무죄 판결.
주인공은 죄인인 인간이 인간의 죄를 다룬다는 데 의문을 제기한다. 그는 인간의 법률이 약자의 아픔은 눈감아 버리고 강자의 불의를 용서하는 모습을 보았다. 하나님께서 왕 다윗의 간음과 살인죄를 가차 없이 꾸짖으신 것과는 다르게 말이다. 법정에서 카튜사와의 재회가 주인공을 불완전한 법과 부조리한 현실에 눈뜨게 했다면 그녀와의 작별은 그의 시선을 제도가 아닌 인간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죄인은 죄를 처벌할 자격도, 죄를 제거할 능력도 없기에 이를 극복할 유일한 대안은 오직 인간의 부활밖에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소설의 결말에서 부활한 자는 누구인가. 카튜샤인가 네흘류도프인가. 톨스토이가 부활한 사람으로 설정한 인물은 죄짓지 않은 카튜샤를 죄수로 만든 장본인이 자기라는 죄책감을 떠안고 여기에서 해방되기 위해 몸부림친 네흘류도프가 아닐까. 이 땅에서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이 변화하는 것이다.
부활을 읽으면서 느낀 소감은 네흘류도프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무죄가 가능했을까였다. 공작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우연히 참가했다가 억울한 피고인, 그것도 옛 연인이었던 그녀를 석방시키기 위해 담당검사로부터 검찰총장을 만나고 법무부장관까지 면담하는 실력을 발휘한다. 비뚤어지게 보자면 그야말로 전관예우의 폐해를 극대화시킨 법조계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전관예우와 서열화를 막기 위해 도입된 로스쿨 제도가 어언 16년에 다다랐지만 아직도 기성 법조계는 문을 닫고 법원 밖 변론은 종결되지 않은 듯한 모양새다. 애덤 스미스가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 했다면 인간 세상을 작동하는 힘은 보이는 손인 법원이라 할 수 있다. 보이는 손이 건강하고 깨끗해지기 위해서라면 새 부대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법조계가 함께 협력해야 할 것이며 이를 위해 로스쿨의 건강한 성장에 법조계가 힘을 보태어야 할 것이다.
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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