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여러 종교의 공존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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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여러 종교의 공존을 위하여
  • 송기춘
  • 승인 2022.12.29 17: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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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기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송기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하루 최저기온이 영하 십몇 도까지 떨어지는 이 엄동설한에 서울 명동성당 앞에는 스님 한 분이 천주교의 사과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계시다. 서소문역사박물관에 전시중인 천주교 물품에서 불교에서 중요한 법계도(法界圖)를 도용했다는 것이다. 법계도란 의상대사께서 화엄사상의 요지를 210자로 된 게송으로 압축한 도인(圖印)이라 한다. 해인사에 가보신 분들은 한 번쯤 보셨을 미로찾기(?) 같은 해인도가 바로 법계도(화엄법계도)라 한다. 하얀 바탕(종이)에 검은 글자와 붉은 도인의 줄은 각각 물질, 인간, 지혜의 삼종세간(三種世間)을 나타낸다고 한다. 법(法)에서 시작하여 불(佛)로 마치는 210자 게송은 전체 도인을 4분 하여 구불구불하지만 한 줄을 이룬다.

서소문역사공원 안에 있는 서소문역사박물관의 공식 명칭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다. 천주교의 성인인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정하상, 남종삼 등이 순교한 곳에 세워진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시설이다. 이 터가 본래 조선 중기 이후 형장(刑場)이었으니 유독 천주교인들만 처형된 곳은 아닐 테지만 천주교에서 종교적 기념관을 세웠다. 건축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받았고 박물관 건물 소유권은 서울 중구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주로 천주교 관련 물품이 전시되고 있으며 그 가운데 불교계에서 문제 삼는 나전칠기 작품이 있다. 여기에는 긴 묵주를 법계도와 비슷하게 구불구불 한 줄로 배열하고 그 끝에 십자가를 달고 있는 형상이 있다. 천주교에도 불교에도 익숙지 않은 내게는 천주교 전시물의 묵주 배열이 법계도를 도용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막힘이나 끊임이 없는 길 자체보다 그 길에서 만나는 210자가 중요한 것이라면, 끊임이 없이 묵주를 배열하는 것이 법계도와 비슷한 착상에서 비롯된 것이든 아니면 아예 본뜬 것이든 그게 종교간에 사과까지 요구할 사안인가 싶기도 하다. 저작권 침해 여부를 논할 사안도 아닌 듯하다. 어쩌면 추위 속에 농성을 하시는 스님의 손가락은 불교에 대한 천주교의 태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느 땅이나 깊이 파보면 억겁의 세월이 만든 지층이 있듯이, 이 땅의 역사가 펼쳐진 장소 역시 여러 종교의 층이 쌓여 있다. 천주교에서 성지로 자리매김하는 주어사나 천진암은 본래 불교 사찰이었고, 교난을 피해 이곳에 들어온 천주교인들이 은거하면서 천주교를 배우던 곳이다. 천주교로서는 이 땅에서 신앙이 싹을 틔운 곳이겠지만 불교에게는 천주교인들을 숨겨주다가 스님들도 처형당하고 절도 없어지는 고초를 겪었다고 하니 이곳은 천주교 하나만의 유적지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서소문형장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곳이 천주교의 성인들의 순교지인 것은 분명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을 당한 곳이기도 하고 불교도 배제될 리 없다. 전주에도 치명자산이라는 곳이 있는데,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아직 익숙하지 않을 치명자(致命者)는 그야말로 천주교의 용어인데 순교자(martyr)라는 뜻이니, 치명자산은 순교자산(몽마르뜨, Montmartre)이다. 예전에는 중바위 또는 승암산이라고 불렸는데, 2002년 월드컵 개최에 즈음하여 천주교인 중심의 성지순례 관광을 홍보하고자 천주교식으로 명칭을 바꿨다고 한다. 전주시 관광에 도움이 된다는 세속적인 목적을 기대한 것이겠지만, 정교분리원칙을 취하는 국가에서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 산에는 승암사라는 천년고찰도 있다.

우리의 종교의식은 유교, 불교, 기독교, 무속 등이 복합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국민들이 가지는 종교도 다양하다. 그러면서도 종교 사이에 극단의 갈등 없이 잘 공존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존이 흔들릴지 모른다는 느낌도 든다. 천주교 전시물에 담긴 형상이 불교의 중요 상징을 도용한 것이라는 항의 속에는 이러한 종교간의 갈등의 맥락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신과 다른 종교에 대한 혐오나 배척의 정서마저 있는 시대다.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와 정교분리원칙이 종교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는 방지할 수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다종교 사회 속에 살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종교인들의 관용과 예의가 아닐까 생각한다. 종교적인 장소의 건축, 보존이나 기억에도 이 점은 다르지 않다.

송기춘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전북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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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혜림 2022-12-30 17:30:08
지킬건 지키는게 예의있는 처사일거란 생각이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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