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 심의민주주의와 공론화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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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 심의민주주의와 공론화위원회
  • 신희섭
  • 승인 2017.07.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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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 베리타스법학원전임 

며칠 전 집에서 보니 딸아이가 자주 화장실을 갔다. 탈이 났나 물어보니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아이가 화장실을 자주 간 것은 게임을 하기 위해서였다. 최근 핸드폰 게임에 푹 빠졌는데 어른들이 게임을 하지 말라고 하니 화장실에 가서 용변을 보는 척하면서 게임을 하는 것이었다.

게임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도덕적으로 비판받을 일도 아니다. 문제는 게임을 너무 오래하면서 다른 일을 안 하는 것이다. 균형감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면 어른들은 걱정이다. 그래서 말리기도 하고 못하게도 한다. 이렇게 되면 가족 내 분쟁이 생긴다. 언성이 높아지면서 갈등의 강도는 높아진다. 이 상황이 악화되면 승패가 명확해지는 치킨 게임이 된다.

문제가 무엇일까? 중간 지점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적당한 점에서 상호 양보가 있어야 하지만 쉽지 않다. 하지만 잘 안된다. 왜? 매일 보니까 너무 친숙하기 때문에 중간지점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잘 못한다. 아직 아이는 교육을 받아야 하는 대상이라는 논리와 애정과 사랑이라는 논리가 끼어들면서 중간지점을 찾기 어렵게 만든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아이들과의 관계가 나빠지게 만든다. 분쟁에서 대체로 결과는 정해졌다. 이런 과정 속에서 가족 간의 대화가 사라지게 될 수도 있다.

너무 멀리가기 전에 원 주제로 돌아오자. 딸아이가 화장실에서 게임을 한 일의 결론은? 해법을 찾았다. 게임을 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하되 조건을 달았다. 숙제를 하고 쉬는 시간에 게임을 하는 것으로. 너무 단순하지 않나? 그렇다. 해결책은 대부분 너무 단순하다. 다만 이 해법에는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합의를 하고 그 합의를 따라야 한다는 점이 어렵다.

조금만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 과정을 지켜내기 위한 전제 조건들이 많다. 우선 상대방의 기호와 선호를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상대방의 선호를 무시하면 안된다. “무슨 게임 따위에 시간을 쓰냐?”라고 생각하면 상대방과의 합의는 없다. 이런 상황을 막으려면 개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여기서 어려운 것은 구성원들 사이에 평등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있다. 가족구성원들이 대화를 하면서 서로 이견을 조정해 가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합리성(rationality)을 성찰성(reflexivity)에 양보해야 한다. 그런데 성찰성, 이것이 어렵다. 성찰성이란 무엇이 맞고 틀릴 것이라는 절대적 기준을 포기하고 대화를 통해 입증한 것만을 타당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자세를 가지는 것인데 이것이 쉽지 않다. 지적인 면에서나 도덕적인 면에서 자신이 가진 기준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가족구성원들인 자녀들이나 어린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어른들이 이 규칙을 따르는 것이 어렵다. 그동안의 경험과 자신이 만들어 둔 신념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와 그럴 필요가 있는지의 고민이 생기기에 때문에 더더구나 어렵다.

게임을 어느 정도 할 것이며 가족구성원들이 어느 정도까지 용인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면 이 보다 더 큰 공동체에서 무엇을 결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서구에서 심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 혹은 숙의민주주의라고 불리는 민주주의의 실험은 공동체가 무엇을 결정할 때 ‘심의(deliberation)’라고 하는 논의과정을 거칠 것을 제안한다. 논리는 심의라는 깊이 있고 심도 높은 토의를 과정을 거치면서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이 합의를 정책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기존의 대의민주주의가 합리성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선호를 고정시켰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찾기 어렵다는 문제의식에서 발전한 이론이자 정치 실험이다. 공론조사를 하거나 심의투표를 하는 것으로 대의민주주의에서 결정이 어려운 사안들을 해결하고자 한다.

7월 24일 정부는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문제를 두고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시민들이 결정한 의견을 따라 원전건설여부를 결정하겠다고 한다. 불필요한 논쟁을 줄이면서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시민들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앞서 본 가족 사례는 원전이라는 국가적 사업과 차이가 크다. 교육의 주체와 대상이 되는 가족사이의 문제와 대등한 성인들 간의 공동체운영이라는 조건도 다르다. 하지만 인간과 인간이 만든 집단사이에서 심의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간다는 점은 동일하다. 게다가 전제조건으로서 구성원들이 자유로워야 하고 평등해야 하며 심의성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같다. 한국의 5천만이 넘는 공동체 규모에서 이런 조건을 충족해가면서 심의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 게다가 심의를 하는 시간도 많이 걸리며 중간에 시행착오도 거치게 된다. 또한 심의에 참여하는 시민이 심의의 기간 동안 계속해서 공적 가치를 중시하는 시민으로 남을지 아니면 자신의 이익에만 매달린 이익추구자가 될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심의민주주의자들도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보완장치로 심의민주주의의 의미를 규정하고 있다.

심의 자체는 거부할 것이 아니다. 사회문제들과 분쟁들을 심의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은 시민을 키우는 사회 교육 그 자체이다. 게다가 심의를 거쳐 우리가 몰랐던 것을 새로 발견할 수도 있다. 타협과 합의를 배우고 그 합의와 정당성을 토대로 정책을 밀고 나갈 수도 있다.

심의를 누가 중심이 되어 하는가도 중요한 논쟁점이지만 문제의 본질은 심의를 하는 기간을 정하는 것과 심의의 결과를 직접적인 정책으로 받아들일 것인지에 있다. 게다가 대의민주주의의 핵심적 기구인 의회와의 관계 규정도 필수적이다. 심의를 거친다는 것이 대의민주주의의 의회와 정당을 우회하는 정당화장치가 되서는 안된다. 의회는 원래 만들어진 취지가 공적인 문제를 심의하는 것 아닌가!

원자력에너지 안전성과 비용문제를 떠나서 월성 5,6호기 사업은 전원개발사업 예정구역 고시를 시작한 2000년부터 16년을 이어온 사업이다. 이 과정들에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계획을 수립하고 안전문제를 다루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론화위원회를 만들어 3개월의 공론화를 거쳐서 속전속결로 정책을 결정하겠다는 것은 심의과정을 너무 단순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시민배심원단이 결정하면 그것을 정부도 따르겠다고 하는데 심의기구는 심의를 하는 것이다. 그 심의를 토대로 실제 정책이 되는 것은 의회와 정부의 역할이다. 심의민주주의이론 만든 하버마스도 최종적 결정을 시민사회나 시민단체가 아닌 입법부로 넘겨주었다.

답답한 현실에서 정부와 대통령은 시원시원하게 정책결정을 하고 시민들에게 권력을 돌려주어 박수를 받으면서 역사 속에 기록되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일이다. 하지만 지도자(leader)라면 그 유혹을 한 번쯤은 되돌아보아야 한다. 공론(公論)화가 속전속결로 처리하고 싶은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정당화장치가 되어 공론(空論)이 되거나 ‘공격을 위한 논쟁(攻論)’이 되지 않아야 한다. 민중주의의 유혹은 항상 박수 받고 싶다는 충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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