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44) - 비 냄새 바람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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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44) - 비 냄새 바람 냄새
  • 차근욱
  • 승인 2017.07.04 1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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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공단기 강사

나름 지키고 있는 원칙 중에, ‘비가 오는 날이면 되도록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 있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원칙이 있느냐고 화를 내셔도 할 수 없다. 비가 오는 날은 밖에 나가는 것이 나는 싫으니까.

그렇다면 비가 오는 날은 왜 그렇게도 밖에 나가기 싫으냐 묻는다면, 음... 글쎄. 왜일까.

굳이 이유를 찾아본다면 신발이 물에 젖어 발이 축축한 채로 다니는 것이 싫다. 군에 있을 때 ‘활동화(알 수 없는 일이지만, 군대에서는 운동화를 이렇게 부른다.)’의 밑창은 정말 싸구려 고무였던 탓에, 운동하고 뛰다보면 한 달 만에 그냥 찢어져 버렸다. 물론 사회에서야 운동화 밑창이 찢어지면 다시 사 신으면 그만이지만, 당시의 군대는 그렇지 못했다. 일단 보급품을 신청해도 언제 보급이 나올지 알 수 없다.
 

들리는 말은 활동화 신청자가 밀렸으니 6개월에서 1년쯤 지나면 새 활동화를 받아 쓸 수 있을 거라는 대답이 전부다. 그럼 그냥 사다가 신으면 안되나? 당연히 안된다. 짬도 안 된 놈이 사제 활동화를 신고 돌아다니다가는 고참들에게 끌려가 복날의 개처럼 두드려 맞고 24시간 내내 갈굼을 당해야 하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운동화는 사 신을 수 없다. 그러니 군대에서 활동화 밑창이 찢어진 상황을 만나게 되면 그냥 찢어진 활동화를 신으며 다니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활동화를 신고 온갖 작업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다보면 발은 온갖 오폐수에 담궈진 상태로 지내야 한다. 그렇게 1년쯤 발이 썩어가면서 지내다보면 금방 밑창이 찢어지는 새 활동화를 받아볼 수 있다. 그런 말도 안되는게 어디 있느냐 따져도 소용없다. 군대란 원래 그런 곳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발이 젖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발이 이상한 물에 젖어서 온갖 피부병에 시달리는 것은 군에서 충분히 경험했다. 덕분에 전역 후 몇 개월이나 병원에 다녀야만 했었다. 그러니 발이 젖는 것은 진저리나게 싫다. 하지만 비가 오는 날 밖에 나가서 발이 젖지 않는 일이란 없다. 신발이란 물건은 원래 비가 오는 날이면 물에 흠씬 젖기 마련이니, 비가 오는 날 밖에 나가면 100% 발이 젖을 것이고 발이 젖는 느낌 자체가 나는 너무나 끔찍한 악몽 같아서 비가 오는 날에는 일이 있거나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

이것이 과연 합리적인가를 떠나서, 뭐 개인적으로는 그렇다.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겠지만서도.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어떤 날을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비가 올 것 같이 약간은 흐린 날씨를 가장 좋아한다는 답변을 한다는 것이다. 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어? 라고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물어도 소용없다. 나는 ‘비’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는 날 ‘밖에 나가 발이 젖는 것’이 싫은 것이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이 흐린 날은 뭔가 살짝 두근두근 한다. 어린 시절부터 그랬는데, 뭔가 생각하지도 못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래서 재난영화 마니아가 된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간에 비가 오기 전, 그 스산한 바람의 흐린 하늘이 나는 못 견딜 만큼 좋다.

대학 2학년 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부산에 혼자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아마 부산을 혼자 가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태어나 부산을 여행의 형태로 가 본 것은 대학을 입학한 뒤 얼마 되지 않아 고교친구들과 함께 간 경험이었지만, 그 때는 친구들 분위기에 휩싸여서 이곳저곳을 천천히 둘러보기 보다는 해변가에서 청승을 떨다 오는 것에 그치고 말았었다. 뭐, 원래 그런게지.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사내 녀석들은 이제 대학생이네 뭐네 해서 해변가의 로맨스를 꿈꾸지만, 세상에 어디 그런 것이 있던가. 그냥 뙤약볕에서 마신 소주를 못 이겨 텐트 안에서 내내 자다 온 것이 전부였다. 실망도 그런 실망이 없을 정도로.

그래서 혼자 차분하게 부산이라는 도시 구경을 하자고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나선 길의 부산은 비가 왔다. 그리고 나는 의도치 않게 숙소를 찾는 도중, 비 오기 전 살풋한 비 내음과 바람내음을 맡으며 국제시장을 걸었다. 바람 역시 알싸하게 불어왔다. 그 순간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비가 내릴 때까지 그렇게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비가 쏟아진 뒤 맑게 씻긴 거리를 또 걸었다. 그 당시 무엇을 먹었는지 어디를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비가 내리기 전 그 순간의 떨림만은 고이고이 가슴 속에 간직되었다.

비 오는 날 밖에 나가는 것은 되도록 싫다. 하지만 비오기 전 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나는 우산을 챙겨 나선다. 비가 오기 전 거리의 풍경은 다른 얼굴을 한다. 냄새도 공기도, 모든 것이 달라진다. 걷다보면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율배반일지도 모르지만 비오는 날 밖에 나가기 싫은 나는, 그렇게 빗 속을 혼자 걷는다.

장화를 사라고? 그건 또 싫다. 통풍이 안 되면 그게 더 찝찝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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