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0)-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을 실현하려는 노력 _ <애국하는 노래>와 ‘독립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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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의 '국문학과 국사의 입맞춤'(20)-자주국권, 자유민권, 자강개혁을 실현하려는 노력 _ <애국하는 노래>와 ‘독립협회’
  • 이유진
  • 승인 2017.06.27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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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남부고시학원 국어

국사전공지식 : 이재혁

깊은 잠을 어서 깨어 부국강병(富國强兵) 진보하세
<합가> 남의 천대 받게 되니 후회막급 없이하세

합심하고 일심되어 서세동점(西勢東漸) 막아보세
<합가> 사농공상 진략하여 사람마다 자유하세
(중략)

                            <애국하는 노래>, 이필균

1896년, 《독립신문》에 실렸던 이필균의 <애국하는 노래>입니다. 개화가사인 이 작품은 계몽을 통해서 봉건 사회를 벗어나 부국강병을 이루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모두 노력하자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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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조선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내정 간섭을 물리치려 하였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신변에 불안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처소를 옮겼습니다. 이로 인해 러시아를 필두로 하는 열강의 이권침탈은 날로 심해졌습니다. 정부에서는 갑오개혁을 포함한 여러 개혁조치를 단행하며 부국강병을 실현하려 했지만, 개혁의 효과는 미미했습니다. 개혁의 기반인 민중은 개혁이 무엇인지, 왜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였죠. 영국의 여행자이자 작가였던 이사벨라 비숍은 자신의 저서 《조선과 그 이웃사람들》에서 1896년 4월 조선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개혁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아직도 두 계급, 약탈자와 피약탈자로 구성되어 있다. 면허받은 흡혈귀인 양반 계급, 그리고 인구의 나머지 5분의 4는 피를 공급하는 ‘하층민’인 평민계급이다.”1)

같은 해 갑신정변으로 10년간 귀국금지조치가 내려졌던 서재필이 조선에 귀국했습니다. 그는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이 실패한 원인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조선이 열강에 기댄 점, 둘째로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점이 바로 가장 큰 원인이었죠. 그래서 서재필은 개혁에 민중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위해 민중의 근대의식을 고취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계몽 운동에 주력하게 되었죠.

먼저 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습니다. 국문과 영문판을 동시에 발행하여 국민들이 세상 돌아가는 일을 쉽게 알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조선의 사정에 대해 알 수 있게 하였습니다.2)

다음으로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회정치단체인 ‘독립 협회’를 설립하였습니다. 독립협회의 활동은 자주독립(自主獨立), 자강개혁(自强改革), 자유민권(自由民權)의 세 가지 목표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자주독립운동’은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가의 자주권을 확립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사대주의의 상징이었던 모화관 영은문을 헐고 독립관과 독립문을 세워서 이를 상징으로 삼고, 고종의 환궁을 호소하여 결행하게 하였습니다. 또한《독립신문》에 자주독립에 관한 논설을 자주 실어 국민의 자주독립의식을 높이려 하였고, 외국에 대한 각종 이권의 할양을 반대하는 동시에 이미 침탈된 이권을 되찾을 것을 주장하는 논설을 싣기도 하였습니다.

‘자강혁신운동’은 부국강병을 위해 내정을 개혁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개혁하고, 행정과 제정 제도를 근대적으로 개정하며, 신교육과 함께 근대적 산업 개발을 촉구했습니다. 또한 근대적 국방력을 기를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유민권운동’은 자주독립과 부강의 기반이 국민의 권리신장에 있다고 보고 인간의 기본권인 생존권과 재산권을 보호하자는 운동이었습니다. 국민의 참정권 운동을 전개하여 언론과 집회의 자유권, 국민평등권, 국민주권론 등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의회 설립을 주장하여 당시 유명무실하던 중추원(中樞院)을 개편하고 이를 관선의원과 민선의원으로 구성하되, 독립협회 회원을 민선의원으로 선출하자고 하였습니다.

1898년에는 국정 개혁을 실현하기 위해 민중의 정치운동인 ‘만민(관민)공동회’를 종로에서 개최했습니다. 정부의 고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여섯 항목의 ‘헌의 6조’를 채택하고 고종에게 건의하여 그 실시를 약속받기까지 하였죠.3)

당시 보수적 집권 세력은 부국강병과 일부 국정 개혁에는 동의했지만, 참정권 등 자신들의 기득권을 양보하는 독립협회의 정책에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입헌군주제를 황제 폐위와 동일한 의미라며 모함했고, 고종은 독립협회 간부 10여 명을 체포하여 협회 해산을 명하였습니다. 독립협회 측에서는 연일 만민공동회를 열어 투옥인사의 석방, 독립협회의 부활, 그리고 헌의 6조의 시행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정부는 보부상이 중심이 된 황국협회를 조직한 뒤, 독립협회와 충돌하여 사회혼란을 구실로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습니다.

독립협회는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민족 운동을 펼쳐나갈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만들고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죠. 이들의 정신은 이후 헌정 연구회, 대한 자강회 등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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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능특강 5분 사탐 中 한국근현대사 9강, ebs,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삼영사
3) 한국사통론, 변태섭, 삼영사

2015 국회직 9급
※ 독립 협회에 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① 독립신문 창간 후 발족되었다.
② 황국 협회와 협력하면서 개혁을 추구하였다.
③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개최하였다.
④ 토론회 활동 이후 민중 세력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⑤ 해산된 후 헌정 연구회, 대한 자강회로 이념이 계승되었다.

정답 ② 황국 협회는 1898년 고종의 측근 세력이 보부상을 앞세워 독립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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