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게으름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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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게으름에 대한 단상
  • 고대석
  • 승인 2016.08.19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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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석 서울지방법원 판사

게으름은 즐겁지만 괴로운 상태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인가 하고 있어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

이 짧은 글만큼 게으름을 잘 정의한 글이 또 있을까? 무언가 할 일이 있을 때 일을 미루는 것만큼 달콤한 유혹은 없다. 당장에 어떤 일을 결정하고 처리해야 할 상황에서 벗어나 지금 할 일을 미룰 수 있으니 (몸은) 즐거운 상태다. 하지만 무언가를 미뤄두면 딴 짓을 하면서도 그 일이 자꾸만 머리를 맴돌고 있으니 참으로 (마음은) 괴로운 상태다. 그런 의미에서 본인은 굉장히 ‘즐겁지만 괴로운’ 사람이다.

문제는 이 게으름을 빨리 떨쳐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몸이 따르지 않는 데 있다. 식당을 예약할 때, 새로 개봉하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예매할 때, 다른 지역에 갈 일이 있어 기차표를 예매할 때 미리 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설령 급한 일이 생겨서 예약을 취소하게 되더라도, 대부분은 며칠 전까지만 취소하면 위약금 없이 깔끔하게 예약 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오늘도 이론은 완벽하게 외우고 있으면서 막상 시간이 많이 남으면 예약을 미루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아 지금 전화하기는 좀 귀찮은데 이따 퇴근해서 해야지. 막상 집 들어오니 귀찮은데 내일 해야지. 지금은 식당 점심시간이라 바쁠 텐데 좀 한가한 시간에 전화해야지’ 그러다가 다른 일에 신경쓰다 보면 어느새 약속 당일이 되어 있다. 아이코 망했구나 하면서 그제야 전화를 해 보고 컴퓨터를 켜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예약은 끝났다는데.

예약을 미뤘다가 실패해서 상대방에게 된통 혼나지 않으려면 해답은 간단하다. 생각났을 때 바로바로 일을 처리하면 된다. 간디의 표현을 조금 바꿔보자면, ‘우리는 무엇인가를 (생각났을 때 바로) 함으로써 행복해질 수 있다’.

예약 같은 문제는 사실 사소한 문제다. 오늘 못 먹은 밥은 다음 주에 먹으면 되고, 영화관에 좋은 자리가 없으면 앞쪽 구석진 자리에서 보면 그만이다. 그런데 우리의 업무는 어떤가?

재판, 그 중에서도 판결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당사자와의 약속이다. 오늘 진행한 사건 하나가 판사에게는 수백개의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할 수 있지만, 그 사건의 당사자인 원고와 피고에게는 앞으로의 삶을 결정하는 중대한 사건일 수도 있다. 변론을 종결하면서 판결선고일을 3주 후로 잡았다면, 판결을 기다리는 원고, 피고에게는 그 3주가 3년, 30년과도 같은 시간일 것이고, 남은 기간에는 밥을 먹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아니면 잠든 와중에도 판결 생각에 식은 땀이 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판사는 그 누구보다도 게을러서는 안 되는 직업이다. 내가 잠시 내 몸이 즐겁고자 지금 할 일을 미룬다면, 그 사이에 재판이나 판결을 기다리는 당사자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갈 것이다.

사람의 버릇은 금방 바뀌지 않는다. 게으른 성격을 바꾸겠다고 노력하지만 예약전화를 미루는 버릇이 당장 오늘내일 180도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업무의 영역에서 게으름은 용서받을 수 없다. 더 늦기 전에 몸은 즐겁지만 마음이 괴로운 게으름의 버릇을 버리고, 몸은 덜 즐겁지만 마음이 즐거운 성실함의 영역에 안착할 일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 소통광장 법원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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