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개새끼와 하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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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개새끼와 하치이야기
  • 오시영
  • 승인 2016.07.2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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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변호사/시인

한국인이 사용하는 욕설의 빈도를 조사하면 아마 “개새끼”가 1위이지 않을까 싶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개새끼라는 욕설을 자주 내뱉는다. 최근 시중에 화제가 되고 있는 녹취록에도 걸핏 하면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개새끼라는 욕설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개새끼보다 조금 순화된 욕설이라면 아마 “개자식” 정도일 것이다. 개새끼가 되었든 개자식이 되었든 모두 개의 귀한 자식님을 인간비하의 비속어로 사용하고 있음에서 진짜 개에게 좀 미안한 생각이 든다.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무더위 속에서 몸보신 하겠다며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보신탕, 사철탕을 찾는다. 애완견과 식용견의 한계가 모호한 상황에서 서양 일부 국가에서는 식용견을 보신탕으로 종종 먹는 한국인들을 야만인, 미개인이라 비난하며 보신탕식문화금지를 주장하거나 시위를 하기도 한다. 개는 주인, 사람에게 충직하기로 소문난 동물인데, 왜 사람들은 자신의 기분이 가장 나쁠 때 “개새끼”라고 욕설을 할까?

일본 시부야역에는 개동상이 있다. 일본작가 신도 가네토의 소설 “하치 이야기”는 이 개동상과 관련된 이야기이고,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일본 영화는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 없지만, 프리티우먼의 리차드 기어와 본 슈프리머시의 매력적인 여배우 조안 알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리메이크 영화 “하치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상영되어 그 내용이 잘 알려져 있다. ‘하치’는 우리나라 진돗개에 버금가는 일본의 전통견 아키타견으로 주인에게 충직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하치는 자신의 주인인 우에노 교수를 매일 퇴근시간에 맞춰 시부야역으로 마중을 나가 퇴근한 주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에노 교수가 강의 도중 갑작스럽게 쓰러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도 하치는 평소처럼 시부야역으로 오지 않는 주인을 마중 나가기를 반복하다가 죽게 된다. 이러한 충직한 하치를 갸륵히 여겨 세워진 동상이 바로 시부야역의 개동상이다. 이 점에서 보면 충성심 가득한 개야말로 배신을 밥 먹듯이 하는 사람에 비해 백배 훌륭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국어사전은 개새끼에 대하여 “하는 짓이 얄밉거나 더럽고 됨됨이가 좋지 아니한 사람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위와 같이 충직한 개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나쁜 사람을 일컬어 “개새끼”라고 욕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개의 충성심과 그 충성심의 내용이 서로 불일치할 때 느끼는 모순과 배신감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개는 일단 주인이 정해지면 맹목적 충성을 한다. 자신의 목에 개목걸이가 걸린 채로 주인을 지키기 위해 짖고, 으르렁거리고, 물어뜯는다. 상대방이 누구든 상관하지 않는다. 주인이 아닌 자는 모두 적일 뿐이다. 주인이 생각을 통제하고, 개목걸이로 행동을 제한하는 억압과 공포의 문제는 이미 충성심으로 세뇌된 개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새끼”라는 비속어는 개주인의 언어가 아니다. 오직 개주인의 상대방, 즉 타자의 언어일 뿐이다. 개주인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개를 향해 개새끼라고 욕하지 않는다. 박대하지 않는다. 먹이를 주고 어르고 달래고 아낀다. 껴안고 입 맞추고 보듬고 쓰다듬는다. 친밀도가 보통이 아니다. 그런 후 개주인은 “짖어, 물어!”라고 상대방을 공격하라고 개에게 명령한다. 명령을 받는 순간 주인에게 충직한 개는 충직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상대방 입장에서는 주인에게 충직한 개일수록 공포의 대상, 경멸의 대상, 천지간 분별력 없는 나쁜 공격자가 되기에 “개새끼”라고 욕설을 퍼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따라서 “개새끼”라고 욕설을 듣는 자는 주인에게는 충견이지만, 주인을 제외한 모든 이에게는 “비열한 인간”이 되고 만다.

문제는 “개새끼”에게는 자신만의 분별력과 판단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는 오직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만을 배웠기에, 그렇지 않으면 주인이 먹이를 주지 않고 몽둥이를 들기에 주인이 옳다고 하면 옳은 것인 줄 알고, 틀리다고 하면 틀린 줄 알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알면 자신이 다친다. 개는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주관적 분별력이 결여된, 주인에게만 충성스러운 종이다. 그러니 주인과 대척점에 서 있는,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 개새끼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곤란한 공격자이자 방어자이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새끼”라는 욕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런 언어적 내면의 의식을 깊이 생각한다면 함부로 “개새끼”라는 비속어를 남에게 사용할 것은 아니다.

이처럼 개새끼도 문제가 되는 판에, 얼마 전 교육부 나향욱 정책기획관이 99%의 국민을 향해 개ㆍ돼지라는 막말을 하면서, 그들의 신분을 개ㆍ돼지로 고착시키는 신분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확신에 찬 막말을 내뱉고 말았으니, 그 말을 전해들은 99% 국민들이 공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인간에게는 가치판단능력이 있기에 개가 될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될 것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있다. 이때 개가 되겠다고 판단한 자에게 과연 인간으로서의 가치판단능력이 있는 것이라고 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개의 길을 걷겠다고 하는 이들이, 실재로 개의 길을 걷는 이들이 역사 속에 너무나 많이 등장하고 있고, 현실 속에서도 너무나 상존하고 있으니, 그것도 하나의 현상으로서 존재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문제는 누군가인 인간을 자신의 주인으로 섬기고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작정한 경우, 그 주인이 올바르고 의로운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작정을 한 자 역시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게 되어, 주인인 자와 주인으로 섬기겠다는 역할을 담당하는 자 모두 역사에 살아남는다. 옳은 길을 걸은 결과가 하치 이야기속의 하치처럼 아름다운 미담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런데 섬기겠다고 작정한 대상이 옳지 못할 경우에 그로부터 지시를 받아 행동하는 자는 진짜 개새끼보다 더한 개새끼라는 비난을 세상으로부터 듣게 된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더욱 참혹하게 되기 때문이다. 생명을 잃고, 부귀영화를 잃고, 명예마저 잃어 역사책에 “개새끼 같은 자”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

불볕더위 속, 대한민국 최대의 화두로 대두된 세 문제는 “우병우 민정수석의 비리 의혹”과 “삼성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 및 “성주에 사드포대설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병우 민정수석은 국가공권력이 사적 이익을 위해 행사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비리의 집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본인은 단순한 의혹 제기일 뿐 실재 그런 일은 없다고 변명하고 있으나, 변명하면 할수록 실체관계가 양파껍질 벗겨지듯 벗겨지고 있다. 오죽하면 여당인 새누리당에서조차 하루 속히 사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높아지고 있겠는가? 버티기에 들어갔지만, 결국 더 큰 상처만 안은 채 옷을 벗게 될 것이다. 버티면 버틸수록 자신을 임명한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담이 크게 될 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도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메이저 언론들이 우병우 수석에 대한 비리에 집중포화를 쏘아대는 양상이 심상치 않다. 진보언론이야 상시 그런 비난과 의혹을 쏟아놓는 것이 일상이지만, 조선일보가 앞장서서 최고 권력실세라고 할 수 있는 청와대 민정수석을 향해 융단폭격을 하는 것은 예사로운 현상이 아니다. 이 복더위에 싸늘하게 식어가는 민심이반을 직시한다면 하루라도 빨리 자진사퇴하는 길이 그나마 타격을 줄일 수 있는 길일 것이다. 사격장의 타겟은 총알이 한 발 박히면 구멍이 하나만 뚫리지만, 수십 발 쏘아대면 모든 타겟은 너덜너덜 걸레가 되고 만다.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충성하는 개는 하치 이야기처럼 이름이라도 남지만, 자신만을 보호하기 위해 몸부림치면 칠수록 최후는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뉴스타파에서 보도한 삼성 이건희 회장의 성매매 의혹 제기는 너무나 충격적이다. 대한민국 경제대통령으로 불리는 이건희 회장,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고 있는 그의 동영상 속 모습은 일반인의 상상력마저 마비시키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성이야 누가 뭐라 할 수도 없고, 하여서도 아니 되지만, 직업여성으로 보이는 다수의 젊은 여성들과 거액의 대가성 돈이 오가는, 집단성매매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동영상 뉴스에 그냥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삼성의 경제권력이 모든 사안을 덮을 것인지, 아니면 시민단체 등에서 고발한 대로 동영상 속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성매매, 공갈, 협박 등의 범죄 혐의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질 것인지 지켜 볼 일이다.

성주사드포대설치문제는 성주 주민들을 집단분노케 하고 있다. 성주 주민들의 집단분노가 이렇게 극에 달할 것인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관계 당국의 안이한 대처가 중대고비를 맞고 있다. 성주에 사드포대를 배치한 이번 결정은 청와대, 총리실, 외교부, 국방부, 안전행정부의 저급한 수준을 보여주는 단적인 형태라 할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국가안보와 직결된 사드배치문제를 이렇게 졸속으로, 비밀리에 결정한 것은 정상적인 국가의사결정과정이라고 도저히 평가할 수 없다. 사드배치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납득시켜 공감대를 얻은 후 가장 효율성이 높은 지역에 주민들과의 협의 후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진 다음에 설치되어야 민주적 절차를 제대로 거쳤다고 할 것인데, 이러한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미국의 내년 대선 시계에 맞춰 미국 오마바 정권, 민주당 정권의 강압적 요구에 무조건 두 손 들어버린 꼴이 되고 말았으니, 국민적 저항에 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절대지지 지역인 경북 성주지역 주민들의 집단반발을 종북이나 빨갱이로 몰아갈 수 없는 한계 앞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다. 정부시책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유일한 방어이자 공격수단인 종북몰이가 통하지 않으니 다른 방법이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수도권 방어가 포기되고, 수천 발 동시다발적으로 쏘아댈 장사정포 등 근거리 미사일에 속수무책인, 오로지 미국 본토 방어를 위한 대륙간탄도미사일 저지에 약간의 도움이 되는,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기 때문에 괌에 설치된 사드포대로 하여금 포격할 수 있는 준비시간 약 10분을 벌 요량으로 설치될 수밖에 없는 성주사드포대가 과연 중국의 강력한 외교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시급히 설치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일 때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향해 “개새끼들”이라고 욕을 하게 된다.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길거리를 걷다가, 직장에서 일을 하다가 우연히 볼썽사나운 꼴을 보면 저절로 “개새끼”라는 욕설을 퍼붓게 마련이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며, 여기저기에서 울화통이 터진 사람들이 개새끼를 남발하도록 국가가 운영되면 안 되지 않겠는가? 개새끼라는 말이 국어사전에서 사라지는 세상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인류공멸이라는 최후의 날이 오기 전까지, 모든 이들은 생각하고 행동할 것이다. 옳은 생각과 행동의 주인과 섬김의 자로서 합리적 지혜의 삶을 사는 자와 그른 생각과 개새끼처럼 맹목적 충성심으로 세상을 어지럽히며 사는 자로 나뉘어 살아갈 것이다.

개새끼라는 말은 철저하게 타자의 언어이다. 주인은 심복이 개새끼라는 소리를 많이 들을수록 그를 충견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충견은 충견이었다는 죄로 주인에게서 내쳐진다. 그렇게 내쳐진 충견은 이미 주인에게도 성가신 자요, 국민에게는 버림받은 자가 되고 만다. 문제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충견은 자신의 잠시 후 운명을 모른 채 현 순간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개새끼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하치 이야기에서 하치는 말한다, 눈으로 말하고, 행동으로 말한다. 주인은 하치를 따뜻한 사랑과 관심으로 보듬는다. 옳은 길을 걸을 때 어느 누구도 하치를 향해 “야, 이 개새끼야!”라고 욕하지 않는다. 역장을 비롯한 수많은 주민들이 하치를 감싸고 위로하고, 먹이를 가져다주고, 보호한다. 주인에게 충성된 개가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길은 주인이 옳은 길을 걷고, 개가 그 뒤를 따르거나, 그 앞길을 열며 보호하는 길이다.

개새끼라는 타자의 언어를 함부로 사용하지 말자. 말아야 한다. 그런 말을 듣지 않도록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 옳은 사람으로 사는 길은 요즘 같은 불볕더위 속에서 아스팔트 길 위를 걷는 것만큼 힘들다. 그런데 그런 길을 걷는 이가 의외로 많다. 그래서 세상은 아직 살만한 것이다.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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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럭시 2016-09-24 04:40:48
그래서 우리말에는 "개만도 못한 새끼" 라는 문장도 존재 합니다.

차라리 "개새끼" 라고 욕을 하면 충직하거나, 개와 같다는 의미이기라도 해서 그나마 낫겠지만..

"개만도 못한 새끼" 라는 욕은 정말 이 시대에 적절한 욕 문장이 아닐까도 합니다.

하치의 동상이 의미 있는 것은 "개도 하물며 이러한데 사람은 과연?" 이라는 자조적 반성과 그에 대한 표현의 일부도 들어 있지 않을래나요.

주인에게 무조건 충성하는 개만도 못한 존재.. 요즈음의 우리는 이익을 좇아 개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한게 아닐까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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