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오시영의 “그 사람”과 윤창중 “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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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오시영의 “그 사람”과 윤창중 “그 사람”
  • 오시영
  • 승인 2016.06.13 11:2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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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 / 변호사 / 시인

필자의 졸시 “그 사람”은 이러하다. “산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다// 죽어야만 비로소/ 되는 그 사람// 그 사람은 그대로인데/ 어설프게, 복잡하게/ 산 사람이/ 그 사람을 불러내/ 산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잡히지 않는 그 사람은/ 이미 잡힌 그 사람이다/ 딴 짓 못 하는” (미발표작). 사람은 죽음으로써 “그 사람”으로 확정된다. 죽기 전에는 그래도 한 가닥 “변화의 가능성”이 있기에 “그 사람”으로 확정짓기에는 부담이 따른다. 하지만 죽는 순간 그 사람은 더 이상 스스로 변신하지 못한다. 세간의 평가만이 살았던 그 사람을 “확정적으로 죽은 그 사람”으로 특정 짓고 그의 공과를 평가한다. 온전한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평생 훌륭한 인격자로 살던 사람도 죽는 순간 살인이나 강간 또는 매국자 등 도덕적ㆍ법률적으로 비난받을 범죄를 저지르면 그는 영원히 범죄자, 변절자로 기억된다. 반면에 젊어 개차반으로 살았을망정 죽는 순간 살신성인의 모습으로 생을 마감하면 그는 의인으로 기억된다. 어떤 이는 그런 평가는 옳지 못하다고 비판할지 모른다. 삶의 시간에 구속을 받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렇게 평가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아주 못된 삶을 젊어 살았을망정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젊어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개과천선하여 의롭고 선하게 생을 마감하였다면 그 사람은 의롭고 선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죽는 순간, 그 사람이 되는 순간에 그는 의롭고 선하였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무리 의롭고 선하게 살았을지언정 마지막에 변절자가 되거나 매국노가 되거나 범죄자가 된다면 그의 총체적 삶은 그러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어느 경우이든 죽는 그 순간 그 사람 인격의 총화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은 죽기 직전에라도 좋은 사람으로의 변신이 불가능할까? 이론적으로야 가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러한 변신을 하지 못한 채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인 채로 죽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악하게 사는 이는 계속해서 악하게 살고, 선하게 사는 이는 계속해서 선하게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까닭은 사람이 어리석어 죽는 순간을 잘 모르기에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으로 개과천선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잘못 변신하였다가 제 자리로 돌아오는 지혜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이 인간에게 언제 죽을 것이라며 미리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할 기회를, 개과천선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신으로서는 그런 기회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평생 악한으로 살던 이가 죽기 직전 본의 아니게 선한 사람으로 변장하거나 가장할 경우 “죽은 자에 대한 심판”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 것이어서 알려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추측컨대 우리의 경험을 통해 신은 어떤 이에게 ‘시한부 인생’을 알려주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기회를 베풀기도 하지만, 그러한 시한부 인생을 알게 된 이들을 보면 대부분 자신의 한 생애를 되돌아보고 삶을 정리하는데 시간을 귀히 쓰기보다는 이미 신이 정해 놓은 시한부 삶을 무모하게 늘려 보려고 안간 힘을 쓰다가 결국 변하지 못한 채 여전한 그 사람으로 죽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결국 신의 냉혹함과 선심 모두를 선용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축소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축소의 시대는 역설적이게도 곧 팽창의 시대이다. 축소의 시대에 1인당 부담이 팽창하고 있다. 사람의 수가 줄어들고 있다. 자연적 사망자수가 태어나는 수보다 많아져가고 있다. 전라도에 이어 강원도에서도 절대 인구수가 줄어들었다. 몇 년 내에 전국적으로 인구수가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출산인구가 사망인구보다 적기 때문이다. 고령화시대라고 걱정들 하지만 고령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죽는 이가 새로 태어나는 이보다 많다는 것은 필자의 눈에는 축복이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인구의 자연감소가 내수시장을 축소시키고 생산가동인력을 감소시키고, 자력국방의 병력조달을 제대로 공급하지 못해 국가적 재앙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필자의 눈에는 이러한 인구감소야말로 하늘의 자비이자 축복으로 보일 뿐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21세기는 AI(인공지능)가 지배하는 시대이다. 드론과 자동주행자동차로 상징되는 로봇머신의 자동화시대가 도래하였다. 

미래학자들의 예측이 아니더라도 잉여인간 80%의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인구의 팽창은 잉여인간의 양산만을 가져올 뿐이다. 말더스는 인구의 기하급수적 증가는 농산물의 산술급수적 증가를 앞질러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인간의 과학문명의 발달은 농산물의 기하급수적 팽창을 가져와 절대적 식량의 차고 넘침의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경제학자들의 생각은 여전히 인구팽창을 주장하지만, 인구 520만 명의 노르웨이 국민소득이 연 8만 불을 넘고, 560만 명의 덴마크 국민소득도 연 5만 불을 넘는다. 물론 인구수가 많으면 전체적인 국가소득의 양은 많겠지만, 그런들 인구수로 나눠 개인이 가난하게 산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정치가들만 큰 소리 칠 밑천만 만들어 줄 뿐.

이러한 축소의 시대에 국가 패러다임은 변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여전히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성장일변도로 대기업지원책에 골몰해 있다. 개개 국민은 일자리가 없고, 일자리를 어렵게 얻어도 비정규직, 저임금에 시달리며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유엔 산하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가 대한민국 국민 행복지수가 OECD국가 중 최하위이고, 세계 전체 조사 대상 157개국 중 58위에 머물고 있다는데, 여전히 팽창주의로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말이다. 모든 사람은 행복을 추구하고 살지만, 죽음의 정확한 시기를 몰라 여전히 이상한 그 사람으로 살아가고들 있다. 

이상한 그 사람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국민행복지수 58위는 어쩌면 당연한 수치인지도 모른다. 갑자기 그 이상한 사람 중에 윤창중 전 청와대대변인이 다시 출몰했다. 필자는 3년 전 윤창중 인턴추행사건이 대서특필되었을 때, 많은 언론인들이 그를 미국 수사기관에 출두시켜 진실을 규명하여 국가망신을 줄여야 한다고 그를 광야에 내몰았을 때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들의 마지막 소도”가 되어야 한다며 그의 미국 수사기관에의 출두를 반대하는 의사를 본보 칼럼으로 나타낸 바 있다. 다시 말해 설령 그의 행위가 범죄행위라고 할지라도, 해당국의 위조지폐 제작이나 마약, 공해상의 범죄 등과 같은 국제적 범죄가 아닌 한 국가는 자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기에 외교관 신분으로 미국에 대통령을 수행해 나간 청와대대변인을 미국 사법당국의 심판대에 세워서는 안 된다는, 국가는 국민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3한시대의 소도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변한 바 있다.

그런데 그가 3년 동안 문밖출입을 삼가며, 자신의 집 유리창으로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없게 종이를 붙여 가리던 그가 갑자기 미국 수사당국이 미국법상 3년 공소시효가 만료될 때까지 자신을 소환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결백하기 때문이었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스스로 언론의 전면에 용맹스럽게 등장하였다. 우선 그의 주장의 논거가 참으로 해괴하다. 수사기관이 공소시효 만료일까지 자신을 소환하지 않으면 자신이 결백, 무죄가 증명된 것이라는 주장은 참으로 가당치 않다. 피해자가 엄연히 생존하고, 소송을 하지 않은 데 어떠한 흑막이 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청와대가 그의 잘못을 심하게 꾸짖어 모가지를 자른 사실에서 보더라도 그의 잘못은 확실하고, 피해자의 진술이 명백하고, 수많은 조사자들의 전언이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음에 보아 그의 변명은 후안무치하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하겠다. 은인자중하며 반성하고 있어도 시원찮을 판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진실에 반하는 뻔뻔스러움을 보이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고, 세계인에게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어버이연합에 관제데모를 지시한 전현준 행정관도 자르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이 잘라버린 청와대 전 대변인 윤창중의 객기는 대단하다. 

윤창중씨는 아직 그 사람이 되기에는 삶의 남은 시간이 길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축소의 시대에 살아남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팽창의 시대에는 한 자리 꼽사리 낄 여백이 있지만, 축소의 시대에는 앉은 자리가, 선 자리가 갈수록 비좁아질 수밖에 없고, 잊혀지면 도태되고, 도태되면 죽음이 되어 바로 ‘그 사람’이 되어 버리기에, 나쁜 그 사람이 되지 않고자 살아 발버둥치는 삶은 오히려 아름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악한 사람이 더욱 더 악한 그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 악함을 반복한다면 그 사람은 진짜 악한 그 사람이 되고 만다. 윤창중씨가 대한민국 국민이기에 그의 지난 미국에서의 인턴사원에 대한 성추행이라는 범죄행위자일망정 국가가 소도의 역할, 보호자의 역할을 해 그를 보호해야 한다고 아마 대한민국 언론기사 중 유일하게 그를 변호(?)하며 윤창중보호주의자를 자처하였던 필자이지만, 다시 뻔뻔스러운 그의 출현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축소의 시대이다. 우선 가장 먼저 학교가 축소된다. 대학이 축소되고, 일자리가 축소되고, 사람다운 사람이 줄어든다. 모두가 잉여인간이 되어 이 고령화시대를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힘들고 힘든 일이다. 뜬금없는 윤창중씨의 출현은 이러한 축소시대의 공포가 심저에 깔려있다. 축소의 시대에 잉여인간으로 잊혀지는 것이 두렵고, 산 사람이 그 사람으로 확정되는 것이 참아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은 그 사람이 아니라고 강변하며 출현하지만, 그의 첫 마디가 “그 사람보다 더 강고한 그 사람”으로 자신을 그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축소의 시대, 국민행복지수 58위의 나라 대한민국에 ‘산 사람인 그 사람’이 넘쳐나고 있는 것은 분명 비극적 희극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게 만들어 놓은 신의 계획표 속에서 영원히 살 것 같은 부족한 그 사람들이 넘쳐나는 대한민국은 정말 재미있다. 그래, 그 사람이 되어 다오. 필자는 말한다. “그 사람은 그대로인데 어설프게, 복잡하게 산 사람이 그 사람을 불러내 산 사람을 만든다 하지만 잡히지 않는 그 사람은 이미 잡힌 그 사람이다 딴 짓 못 하는” 별로 훌륭하고 좋은 시라고 감히 자평할 수는 없지만, 독자분들께서 한 번 깊이 음미해 주시면 고맙겠다. “그 사람은 이미 잡힌 사람이다, 딴 짓 못 하는”, 그러니 겸손하게 살자, 제발, 나설 때 아닌 때 구별하지 못하고, 나설 자리, 아닌 자리 구별하지 못하지 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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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se 2016-06-14 01:15:08
I don't agree with your opinion about Mr.Yoon because you didn't read his essay why he has to write that essay. You must read his essay first and write this kind article.
If you don't understand fully someone's situation and write about it, it is same as dead article like you mention in your arti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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