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평양냉면 찬양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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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평양냉면 찬양론
  • 신희섭
  • 승인 2016.06.03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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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6월이 왔다. 이제 여름이다. 여름이 되면 찬 음식을 찾는다. 몸에는 별로 맞지 않지만 찬 음식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먹는 뜨거운 음식보다는 먹기가 편하다는 이유로 찬 음식을 찾는다. 그러다 보면 냉면이 여름음식으로 딱 떠오른다.

냉면의 인기가 좋아지는 계절이다. 원래 냉면은 여름음식이 아닌데도 여름 음식이라는 오해로 더운 여름에는 먹기가 오히려 힘들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찾아 유명한 냉면집은 평소보다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길다. 한 삼십분 이상 기다렸다가 자리를 잡고 않아서 먹는 그 맛은 냉면을 먹는 의식(ritual)의 일부이다. “냉면인”이라면 마땅히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모든 음식중의 최고에 ‘평양’냉면이 있다고 생각하는 냉면인으로서 냉면에 대한 이야기 좀 해보자. 언젠가 생각해보았다. 왜 북한에서 내려온 국수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된 것일까? 사람들마다 냉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각기 다를 것이다. 입을 때리는 면의 식감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평양냉면의 메밀 맛이 주는 구수함에 끌려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육수의 은근한 맛을 좋아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고명과 함께 면을 싸서 먹는 맛으로 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평양냉면이 아닌 함흥냉면의 매콤한 양념맛과 함께 고기 육수를 같이 먹는 맛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고기 집에서 고기와 함께 면을 먹는 맛에 혹은 불고기 옆으로 냉면 사리를 넣는 맛에 오는 이들도 있다. 여러 이유가 왜 냉면애호가들이 많은지를 이야기 해준다.

그럼 나는 왜 냉면을 좋아할지도 생각해보았다. 왜 좋아하는지 이유보다 먼저 냉면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떠올랐다.

몇 년 전이었다. 그전에도 냉면을 좋아했던 차에 을지로에 있는 ‘우래옥’에 가게 되었다. 거기서 냉면의 신도가 되는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다. 냉면을 한 입 넣고 씹는데 머릿속에서 펑하고 맛이 터졌다. 마치 만화에 폭죽들이 터지듯이.

그날 냉면을 먹고 나서 3일간은 그 맛이 계속 따라다녔다. 버티고 버티다 2주일 뒤에 다시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평양냉면의 신자가 되었다.

평양냉면의 환자가 아닌 신자가 된 것이다. 중독이 된 것은 같지만 신자는 환자와 달리 냉면을 예찬한다. 병원에 가듯이 끌려다니지 않는다. 주변에서 찬양을 할 신자를 늘리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어느 순간에라도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 ‘님’을 만날 준비를 한다. 신자는 관용도 가진다. 주변에 평양냉면을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이 세계에 진입하는 데 많은 장애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지인에게 ‘우래옥’을 소개한 적이 있다. 다음에 만났더니 온 가족으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고 했다. “걸레 빤 물에다 이게 뭐하는 것이냐”고 힐난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 매운 냉면에 길들여진 이들에게 평양냉면은 심심한 음식이다. 그러나 신도가 되면 슴슴한 그 맛을 경배하게 된다.

신자가 된 뒤 서울에 있는 대부분의 냉면집을 찾아갔다. 냉면은 다신교다. 많은 집들이 서로 다른 맛으로 신도들을 끌어들인다. 종교지도자의 설교가 다 다르듯이 냉면집도 맛이 다 다르다.

자신에 맞는 집들이 있고 잘 안 맞는 집들도 있다. 서양에서 종교전쟁의 과정에서 ‘관용(tolerance)’이 나왔듯이 평양냉면은 관용을 배우게 한다. 민주주의와 정치경제분야의 대가인 아담 쉐보르스키는 관용을 ‘다를 수 있음에 대한 인정(agree to disagree)’이라고 했다. 이 관용의 원리는 냉면의 세계에도 적용된다. 호불호가 강한 음식인 만큼 각자 선호의 차이를 상호 인정해야 말썽없이 더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다.

나는 그동안 신도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와이프와 두 딸아이를 입교시켰다. 그 중 둘째 아이는 광신도이다. 부작용도 크다. 3살부터 먹기 시작한 냉면이라 주기적으로 흡입을 해주어야만 한다. 외식을 하게 될 때 “뭐 먹을래?”의 질문은 의미가 없다. 늘 냉면이다. 행복하게 시리.

냉면을 찬양하게 된 이유는 명확하다. 면과 육수라는 두 가지 음식이 서로 조화를 맞추는 그 지점이 놀랍고 또 좋다. 메밀의 끊어짐과 향이 있고 그 사이에 고기육수와 고명들이 조화를 맞춘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오케스트라의 화음을 맞추는 것(orchestrating)과 같다. 메밀함량을 그날의 날씨에 따라 맞추어주는 냉면 장인들의 노력은 입속에서 여러 개의 맛이 화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고급스럽고 현란한 재료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깊은 맛을 은근히 그리고 아주 충분히 즐기게 해준다. 맛의 밀당이 있다. 먹었을 때마다 펑하고 터지지는 않지만 빈 그릇을 놓고 돌아서는 순간부터 다시 생각나게 만드는 은근과 끈기의 집요함이 있다.

냉면의 위력은 해장에 있다. 간단히 해장술을 주문하고 냉면을 먹어주면 왜 냉면을 선주후면이라고 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낮술에 빠질 수 있는 부작용도 크다.

냉면은 완벽한 음식이다. 메일과 고기향이 있고 맛이 있고 후루룩거리는 소리가 있고 입술과 치아를 때리는 찰짐이 있다. 눈으로 볼 때 면이 던지는 “어 왔어!”하는 눈인사도 있다. 게다가 면과 육수를 즐기면서 하루의 고단함을 잊게 해주는 위로도 있다. 그러니 어떻게 찬양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국에 몇 년 전부터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이 높다. 특히 이태리 공화주의를 도입해서 한국적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들이 늘고 있다. 공화주의는 국가에 대해 계급적 차이를 뛰어 넘는 모든 이들의 공동체로 본다. 계급적 차별이나 특정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가 없는 정치체제로 보는 것이다. ‘공화(共和)’는 함께 화합을 한다는 한자의 의미처럼 로마에서 공화국의 의미인 republic도 res publica 즉 공동의 것에서 나왔다.

공화주의가 한국에서 하나의 흐름이 되는 것은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의 심화에 더해 양극화와 같은 사회구조적인 갈등을 풀어보려는 이유 때문이다. 사회주의의 이론적 빈 공간을 공화주의적 ‘해방’의 관점에서 채우고자 하기도 한다. ‘예속과 예종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비지배’라는 이론적 자원을 가지고 한국사회의 약한 정치이념과 그에 따른 정책간 불협화음을 해결하고자 한다.

정치권에서도 ‘공화’를 주장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공화’라는 아름답고 바람직한 담론이 사회를 조화시키면 좋겠다. 그러나 이 개혁시도 역시 저항을 불러올 것이다. 사회적 저항을 적게 가져올 수 있는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평양냉면을 보고 배우라는 것이다. 재료 각각의 개성이 살아있으면서도 냉면전체의 조화를 이루게 하는 장인들의 노력이 은근하지만 오래 기억에 남는 맛을 만들어왔다. 이처럼 현실정치에서 ‘공화’를 만들 수 있는 장인이 필요하다. 예속의 탈피를 소개하고 치장하는 것을 넘어서는 현실정치에서 ‘조화의 장인’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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