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연 미국변호사의 미국 로스쿨, 로펌 생활기(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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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연 미국변호사의 미국 로스쿨, 로펌 생활기(17)
  • 박준연
  • 승인 2016.01.2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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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연 미국변호사

드라마 속의 로펌, 변호사들

예전 외교부에서 근무할 때 외교관이 주인공인 드라마 두 편이 동시에 방송된 적이 있었다. 이때 마침 공보관실에서 일하면서 외교부 홍보 업무도 돕고 있었는데,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외교부 견학 프로그램에서 드라마의 영향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견학에 참석한 초등학생들한테 사인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하고, 드라마에는 나오지만 실제 청사에는 없는 공간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 부처 홍보 업무가 많이 수월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뭔가 간질거리는 느낌도 없지 않았다. 

직업을 바꾸고 나서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있으면 눈여겨보게 된다. TV 드라마나 영화를 욕하면서 보는 걸 영어 신조어로 “hate-watch”라고 한다는데, 변호사가 주인공인 드라마, 특히 로펌이 배경인 드라마 중에는 그런 식으로 시청하는 드라마가 없지 않다. 제일 못마땅한 것은 이런 장면이다. 주인공인 변호사 내지는 그 변호사의 고객에게 곤경이 닥친다. 주인공은 고민하다가 번뜩 천재적인 발상을 하게 된다. 문제는 해결되고 해피엔딩. 

기지와 천재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이 모두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실제로 경험하는 문제의 해결은 더 길고 덜 극적이다. 장시간 서류를 검토하고 팀원들과 회의를 하고 방향을 결정하여 진행한다. 한두 사람의 천재성에 의존하는 일은 거의 없다. 선배들의 발상의 전환을 안 본 것은 아니지만 그건 드라마로 만들면 너무 지루해보이는 자료 검토와 회의, 또 누적된 경험이 있고 나서 비로소 가능한 발상의 전환이다. 그걸 드라마에서는 너무나 쉽게 묘사한다. 

실제로 지난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비공개 안건이 있다. 자료를 봐도 암담하다고들 생각하고 있던 찰나, 예전 문서에 중요한 설명이 있었다. 더운 여름날 밤이었는데 그 설명을 보고 나는 피곤함도 잊고 같은 오피스의 파트너 변호사와 시카고 오피스의 동료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고객 회사의 팀들과 만나 그 문서가 무슨 의미인지 이야기를 나누고, 그걸 바탕으로 미국의 법무부에 설명을 하고 나서, 긴 기다림이 있은 후 결과를 통보받았다. 

그렇다고 변호사가 등장하는 드라마가 하나같이 못마땅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작년 가을에 방송을 시작한 그라인더 (The Grinder)는 이야기보다도 설정 자체에 감탄을 했다. 유명한 드라마, 그러니까 극중극의 변호사 역할을 맡은 배우와 실제로 변호사인 동생, 형제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현실에서는 변호사 자격없이 법률자문 업무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이 드라마에선 배우인 형도 동생의 로펌에서 일을 거든다. 법 지식을 근거로 한 동생의 말보다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내용은 별로 없는 이야기를 내뱉는 형에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모두들 동경하는 형을 냉소적으로 보는 유일한 사람이 있으니 동생의 로펌에서 일하는 어소시에이트 클레어이다. 그녀가 서류 검토 및 요약을 도와달라고 하자 형인 “그라인더”는 드라마 상에선 그런 지루한 장면은 안 다루고 결론으로 넘어간다고 변명한다. 거기에 대한 너무나 당연한 클레어의 대꾸가 좋아서 메모까지 해두었는데, 이런 대사였다. “드라마에서는 넘어가는 그 지루한 장면이 내 일상이야 (See, this boring stuff that you want to skip over, that's my whole life).” 

그리고 로펌 어소시에이트 생활에 대한 짧지만 냉소적인 묘사를 보고 쓴 웃음을 지었던 드라마가, 별 인기를 끌지 못하고 한 시즌으로 끝난 “Working the Engles”이다. 주인공 제나가 대형 로펌을 그만두기 전의 생활을 묘사하는 첫 번째 에피소드는 미국 법조계 뉴스 사이트에서는 꽤 화제였다. 예컨대 1주일간 167시간을 일하고 회사 런치룸에서 미쳐버렸다는 동료 얘기나, 기안을 해서 선배 어소시에이트한테 보냈더니 “잘했는데 다음부터는 영어로 써” 하면서 문서를 던지는 장면. 과장이 심한 장면이지만 스트레스가 많은 환경에서 긴 시간을 일하는 로펌 변호사들이 꽤 공감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드라마의 로펌이나 변호사 묘사는 시청자들이 원하는 바의 반영이겠지만, 이 업계에서 일하는 입장에서는 보다 현실적이어서 공감할 수 있는 변호사 인물 묘사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박준연 미국변호사는...
2002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 제37회 외무고시 수석 합격한 재원이다. 3년간 외무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미국 최상위권 로스쿨인 NYU 로스쿨 JD 과정에 입학하여 2009년 NYU 로스쿨을 졸업했다. 2010년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Kelley Drye & Warren LLP’ 뉴욕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로펌 중의 하나인 ‘Latham & Watkins’ 로펌의 도쿄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필자 이메일: Junyeon.Park@l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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