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시험 한국사과목 주요 기출로 고득점 얻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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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시험 한국사과목 주요 기출로 고득점 얻기5
  • KG패스원
  • 승인 2015.10.08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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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면 기출문제가 보인다.

연재순서 : 1주차: 제주도, 2주차: 울릉도와 독도, 3주차: 강화도, 4주차: 간도, 5주차: 공주 6주차: 경주, 7주차: 평양, 8주차: 서울

 무령왕릉과 왕릉에서 출토된 금관 장식

공주에서 찾는 역사이야기

♢ 공주 석장리 유적

작년 그러니까, 2014년은 공주 석장리 유적 발굴 50주년이 되던 해였다. 1963년 고고학 관련 조사차 한국에 머물고 있던 미국인 앨버트 모어(Albert Mohr)와 샘플(L.L. Sample) 부부는 홍수로 무너져 내린 공주 석장리 강변에서 뗀석기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 소식을 접한 국내 한 대학 교수가 이듬해 5월, 이들 부부와 함께 석기가 채집된 현장을 답사하고 새로운 석기를 찾아낸 후 그 해 11월 석장리에서 첫 번째 발굴을 실시했다. 우리나라에서 구석기 시대 인류의 최초 흔적이 발견되던 순간이었다. 이런 역사적 의의를 생각하면, 사실 북한의 웅기 굴포리 유적과 함께 남북한의 구석기 최초 유적지를 묻는 국가직 문항이 공무원 한국사에서 출제된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 문화 존재를 부정하고 싶어 했던 일제 강점기 식민지적 잔재를 청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발굴 결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 송산리 무령왕릉

1971년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 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무령왕릉은 고구려나 백제의 많은 무덤들과 달리 완전한 형태로 세상에 공개됐다.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아 벽돌로 무덤 내부를 쌓았는데, 무덤 형식이 특이하여 우리 시험에도 자주 출제되니 잘 알아 두어야 한다. 무령왕릉은 왕과 왕비의 지석이 발견되어 무덤 주인이 사마왕(무령왕)이라는 것과 연대를 확실히 알게 되었으며, 왕과 왕비의 장신구와 금관 장식 등 3천여 점의 부장품도 출토되어 백제 미술의 진수를 확인할 수 있다.

♢ 동학농민운동 - 공주 우금치 전투

1894년,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전봉준의 주도하에 봉기하였다. 이들은 황룡촌, 황토현 싸움에서 승리하고 전주성을 접수하였으나 전주에서 관군과 화의를 맺고 해산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자 농민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반외세’의 기치를 들고 재봉기한다. 하지만 공주 우금치 지역에서 농민군은 결국 관군과 일본군에게 패하고, 농민군 지도자였던 전봉준은 체포되어 사형당한다. 동학농민운동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점 그리고 이들의 요구사항이 이후 갑오개혁에 반영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 공주 공산성

공산성은 백제 당시에는 웅진성이라 불렀으나, 고려시대 이후에는 공산성이라고 불렸고,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공산성이 축조된 시기는 백제가 도읍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옮긴 문주왕 이후부터 사비 천도를 단행한 성왕 이전까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수도 웅진을 수비하기 위해 여러 성을 쌓았던 동성왕 때로 대체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적극적인 남하 정책으로 웅진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천도 이후 대외 팽창이 위축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왕권도 약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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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출 문제를 확인해보자.

다음 중 삼국 시대의 정치 발전과 관련하여 가장 적절하지 않은 것은?            2012 경찰

① 무령왕 -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긴 후, 백제의 중흥을 도모하였다.

② 고국천왕 - 왕위 계승이 형제 상속에서 부자 상속으로 바뀌었다.

③ 고이왕 - 6좌평을 두어 업무를 분장시키고, 16품의 관등제와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였다.

④ 지증왕 - 국호를 신라로 바꾸고, 왕의 칭호도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정답] ①

[해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인해 개로왕이 죽고 문주왕이 즉위, 문주왕은 475년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옮겼다. 이후 성왕은 대외 진출이 쉬운 사비(부여)로 다시 도읍을 옮겨 중흥을 도모하였다.

 

다음 (가), (나) 고분 양식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012 법원직

한강 유역에 있던 초기 한성 시기에 (가)계단식 돌무지무덤을 만들었는데, 서울 석촌동에 일부가 남아 있다. 웅진 시기의 고분은 굴식 돌방무덤 또는 널방을 벽돌로 쌓은 (나)벽돌무덤으로 바뀌었다.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비 시기에는 규모가 작지만 세련된 굴식 돌방무덤을 만들었다.

① (가) - 도굴이 어려워 많은 껴묻거리가 발굴되었다.

② (가) - 봉토 주위를 둘레돌로 두르고 12지 신상을 조각하였다.

③ (나) - 벽과 천장에 사신도 등을 그렸다.

④ (나) - 무덤의 천장을 모줄임 구조로 만들었다.

 

[정답] ③

[해설] 벽돌무덤 양식은 백제 웅진시대에 남조의 영향을 받아 축조된 것으로 무령왕릉(송산리 7호분)과 송산리 6호분이 대표적이다. 다만, 무령왕릉에는 벽화가 존재하지 않으며 송산리 6호분에만 일월도, 사신도 같은 벽화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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