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겸허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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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겸허한 마음
  • 김종호
  • 승인 2015.02.2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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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 전 서울중앙지방법원, 현 광주고법 제주재판부 부장판사
 
얼마 전 여러 차례 언론에서 다루어진 어느 사건의 피고인 7명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있었던 일이다. 최후진술을 끝맺으면서 유달리 “겸허한 마음으로 재판부의 판단을 기다리겠다.”고 말하는 피고인들이 많았다. 피고인들의 최후진술을 경청하는 내내 ‘겸허한 마음’이라는 표현을 곱씹다가, 공판을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

“피고인들께서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 재판부의 판단을 기다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재판부도 겸허한 마음으로 선고기일에 우리의 결론을 내어 놓겠습니다. 우리는 피고인 여러분의 유·무죄와 양형에 대해 판단하지만, 이러한 우리의 판단을 다시 피고인 여러분과 검사, 변호인들이 판단할 것이고, 상소된다면 상급심에서 판단할 것이고, 이 사건을 지켜보는 언론과 국민들이 판단할 것이고, 어쩌면 먼 훗날 우리 역사가 판단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말과 생각은 법과대학 시절 형법과 형사소송법을 가르쳐주신 지도교수님께서 수업시간에 해 주신 말씀이 가슴 깊이 박혀있기 때문인 것 같다. “학생 여러분들이 판사, 검사가 되면 칼자루를 잡고 휘두른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판사와 검사 자신들이 역사의 날카로운 칼날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법률가로서 훗날 부끄러워 할 일이 없도록 직무를 수행하라는 은사님의 당부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생각하면 나는 방울과 칼을 들고 날이 시퍼렇게 서 있는 작두 위에서 춤을 추는 무당의 몸짓을 연상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그 말씀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런 감각적이고 선명한 이미지와 함께 남아 있고, 앞으로도 법을 다루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가는 평생 가슴 속에서 강렬한 메시지를 던질 것 같다. 재판에서 사건관계자들뿐만 아니라 그 사건을 지켜보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고, 먼 훗날 후손들도 그럴 수 있는 결론을 내놓으라고.

피고인을 판단하고 생사여탈권을 가진다고도 표현하는 판사의 권한이라는 것도 달리 보면 커다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낱 미천한 존재인 판사가 짊어져야 할 무거운 짐이고, 판사 자신이 만인의 판단대상인 것이다. 하지만 이념으로 갈라지고, 이해관계가 등나무 줄기처럼 얽혀 있고, 하루하루 상황이 급변하는 이 현실에서,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이, 먼 훗날의 후손들도 모두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 있는 결론을 내놓는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동양고전의 표현을 보면, 누구에게나 그러하고, 언제나 그러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이치’라는 설명이 있다. 그리고 이치를 뜻하는 한자(理)는 ‘무언가 다른 것과 구별하게 해 주는 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바람결, 물결, 살결이라는 단어에서 볼 수 있는 ‘결’이라는 말이다. 독일 법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사물의 본성’(die Natur der Sache)과 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사건 하나하나마다 나름대로의 고유한 결을 가지고 있을 테니,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 사건의 ‘결’에 꼭 들어맞는 ‘이치’를 찾고 그것을 제시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기초로 한 결론에 대해서는 생각과 이해를 달리 하는 사람들도, 시대를 달리 하는 사람들도 모두 동의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 누구에게나 그러하고, 언제나 그러한 이치라면.

하지만 ‘누구에게나, 언제나’라는 말은 자연과학이나 순수철학에서나 어울리는 절대적 의미를 가진 단어일 테고, 법학과 같은 사회과학의 영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될 정도의 보편성을 가지면 ‘이치’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설득력 있는 판결을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 권리의무나 유·무죄에 대한 판단, 양형에 대한 판단, 심리절차의 시작부터 끝까지 걸쳐 있는 그 사건의 고유한 ‘결’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그 ‘결’에 꼭 들어맞으며, 널리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고 이해관계나 상황이 바뀌어도 쉽게 달리 말할 수 없는 ‘이치’를 찾아내야 할 것이고, 마지막으로, 그러한 이치와 그것을 기초로 한 결론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평범한 말로 표현하면서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여러 다른 사정을 가정하고 고려해 보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인지 다양한 각도로 살피고 어리석음과 독단을 경계하면서, 그 사건에 꼭 들어맞으면서도 보편성을 가진 이치를 찾고 평범한 말로 그것을 드러낼 수 있다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어쩌면 당장 불리한 결론에 억울함을 느낄 사람들까지도 언젠가는 그 이치를 이해하고 결론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이치에 동의하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항상 판결 선고에 앞서 불리한 결론을 받게 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도 납득이 되는지 생각해 보라’는 선배 법관들의 충고는 이치에 합당하고 설득력 있는 판결을 위한 마지막 점검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판결로 가장 직접적인 불이익을 받게 되는 당사자의 억울한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어찌 보면 설득력의 마지막 목표가 아닐까? 아무리 그 억울함이 오해나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더라도. 필자는 부족한 능력 탓에, 언제나 이치에 합당하고 설득력 있는 판결을 하였다고 훗날 평가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그런 판결을 위해 겸허한 자세로 나름대로 정성을 다하였다고 회고하며 스스로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홈페이지 소통광장 법원칼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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