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조용필의 “바운스”와 싸이의 “잰틀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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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조용필의 “바운스”와 싸이의 “잰틀맨”
  • 법률저널
  • 승인 2013.04.19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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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세상은 언제나 다양하다. 네가 있고, 내가 있고, 그리고 우리가 있고, 적이 있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다. 이처럼 다양함은 언제나 있기에 같음과 다름이 반복하며 우리를 혼란케 하기도 하고 안정케 하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다름을 그냥 다르구나 하고 보지 못하고 적대시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누군들 그러한 편견과 질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어제, 가왕 조용필의 최신곡 “바운스”를 십여 차례나 들었다. 우연히 인터넷에 접속해 연예뉴스를 살펴보다 발표된 신곡에 대한 호기심에 클릭을 했다가 그만 빠져들고 만 것이다. 이순이 지난 그의 목소리가 너무 감미로워 내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대가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Bounce Bounce 두근대 들릴까 봐 겁나/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밤새워 준비한 순애보/ 고백해도 될까/ 처음 본 순간부터/ 네 모습이 내 가슴 울렁이게 만들었어/ Baby You're my trampoline You make me Bounce Bounce/ 수많은 인연과 바꾼 너인 걸/ 사랑이 남긴 상처들도 감싸줄게/ 어쩌면 우린 벌써 알고 있어/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랑의 꿈/ 외롭게만 하는 걸/ You make me Bounce You make me Bounce......” 마치 환갑이 지난 조용필이 어린 소년이 되어 아리따운 소녀를 만나 첫사랑을 고백하는 듯 속삭이고 그 속삭임에 나는 빠져든다. 순수함의 절정이다.


아이러니하다. 최근에 학교 선생님들과 종종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선생님들의 공통된 말씀은 “요즘 청소년에게서는 순수를 찾아보기 힘들다.”라는 것이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 속도전에 길들여진 청소년들에게는 “순수함에 가슴 설레며 망설이거나 기다리는 여유나 습관이 실종”되고 없다는 것이다. 직설적이거나 단선적이 되어 버린 청소년들에게서 6-70년대 청소년들의 순수를 기대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그런데 60이 훨씬 넘은 가수 조용필이 “바운스”를 들고 우리의 감성과 순수를 일깨운다. 바운스의 중독성에 빠져든다. 만일 내가 십대 소년이었을 때 저 노래를 들었다면 그때도 가슴이 설레었을 것 같다. 이순이 넘어서, 이순이 넘은 가수가 부르는 노래에 가슴이 설fp이다니, 음악의 힘은 참으로 위대하다는 감탄을 다시 한 번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용필의 바운스처럼, 우리 모두의 가슴이 순수한 설레임으로 통통 튀는 바운스의 경험을 하였으면 한다.


또 다른 가수 싸이의 “잰틀맨”이 “강남스타일”에 이어 세계적 선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알랑가 몰라 왜 화끈해야 하는 건지/ 알랑가 몰라 왜 말끔해야 하는 건지/ 알랑가 몰라 아리까리 하면 까리해/ 알랑가 몰라 We Like We We We Like Party 해/ 있잖아 말이야/ 이 사람으로 말씀드리자면 말이야/ 용기 패기 똘끼 멋쟁이 말이야/ 너가 듣고픈 말 하고픈 게 난데 말이야/ Damn Girl You so freakin sexy......” 싸이의 노랫말은 직설적이다. 노골적이고 응큼하다. 그러면서도 반어적으로 응큼하고 저질스런 위선자를 통렬히 비꼰다. 제 스스로 저질스러워지면서, 망가지면서, 다른 사람의 저질을 폭로하고 비꼬는 기법이 가히 세계적 인기가수답다. 철저히 상업적이고 계산적이다. 그러한 작위적, 인위적 공작에 세계인들이 속아 넘어가고 있다. 알고도 당하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다.


두 가수의 노래를 교차해 들으면서, 2013년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5년의 가수생활, 수많은 가요대상을 휩쓸며 가왕이라는 칭호를 듣고 있는 조용필, 가수 이외의 다른 길을 쳐다보지 않고 오직 가수로서의 외길을 걸어온 그가 환갑이 넘어 우리에게 선물한 노래는, 바운스 바로 순수함이다. 노년으로 접어드는 그가 “순수함의 극치”를 완성하기 위해 이 노래의 제작에 바쳤을 그 열정과 순수를 상상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노인이 되면 순수해질 것 같지만, 주위를 보면 오히려 노욕에 사로잡혀 노추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나이가 들면서 순수해질 수 있음은 참으로 큰 축복이라고 할 것이다. 싸이는 어떤가? 젊은 가수 싸이가 동년배 젊은이들에 비해 파격적인 삶을 살더니, 마침내 강남스타일로 세계를 열광케 하고, 또 다시 야심적으로 내놓은 잰틀맨 역시 세계적 파급속도가 번개 같을 정도이다. 동시다발적으로 세계인들에게 자신의 노래를 순식간에 전파시키는 파급력은 가히 메가톤급이다.


순수와 가식, 조용필과 싸이가 동시대에 함께 하고 있음은 우리의 축복이다. 두 가수가 별도의 말없이 우리에게 우리의 현실을 직시하라고 충고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조용필의 바운스 가사처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가슴 설레일 수 있어야 하고, 사랑을 고백하며 가슴이 콩당거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순수를 상실한 채 오로지 돈과 권력을 쫓아, 쾌락과 환락을 쫓아 숨 가쁘게 살아온 게 하루 이틀이 아니지 않는가? 싸이가 잰틀맨 가사를 통해 통렬히 비꼬듯, 마치 신사나 숙녀가 된 것처럼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점잔을 떨며 온갖 고상한 척 하다가 아무도 보지 않은 곳에서는 속물근성을 그대로 내보이며 이해를 따지고 있는 우리에게 바운스는 그냥 순수를 깨우쳐주고 있을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당과 야당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윤진숙 해양수산부장관에 대한 임명을 강행하였다. 청문회 과정에서 함량미달이라는 평가를 받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말실수로 구설수에 오른 그녀에 대한 임명을 강행하는 박대통령의 심장은 진짜 강심장이다. 결코 본받고 싶지가 않다. 이 일로 인해 상당기간 정국이 경색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 조직을 이끈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가장 좋은 일은 모두 다 자기 능력에 맞는 옷을 입는 것이다. 그럴 때 조용필의 바운스가 되는 것이다. 만일 자기 능력보다 과한 자리에 있게 되면 그건 싸이가 그렇게 고발하고자 하는 “가짜 잰틀맨”이 되는 것이다.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은 자신이 바운스의 주인공인지 아니면 가짜 잰틀맨인지 구별능력을 갖지 못한다. 그냥 싸이가 만져주고 치켜주고 받들어주는 척 하는 게 가짜 잰틀맨인 줄 모른 채 진짜 잰틀맨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너는 가짜 잰틀맨”이라고 손가락질하는 것을 모른 채 말이다.


정치를 잘 하고, 국민을 행복하게 해 주는 길은 어떤 길이 있을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고 방법이 다를 것이다. 순진한 생각일지 모르겠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정의를 세우는 길”뿐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정의는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정의여야 한다. 그 정의의 추가 기울 때는 국가권력이 나서서 정의의 추를 바로 세워줘야 한다. 까닭에 국가의 존립은 이러한 정의의 실현을 위해 국가권력을 행사할 때만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정부 수립 이래 대한민국은 “정의를 향해 달려 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정의는 아직 실현 과정 중에 있지만 말이다.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달려왔고, 국민의 인권신장을 위해 달려왔다. 그리고 경제부흥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달려왔다. 그게 국가정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제 어느 정도 밑바닥의 정의는 실현되었기에, 싸이의 저급스러운 잰틀맨이 아닌 조용필의 바운스 같은 고급스러운 정의실현이 필요한 시점에 이르렀다.


현대자동차그룹이 광고와 물류 분야에서 계열사 간 내부거래를 축소하고, 다른 중소기업에 직접 발주나 경쟁입찰을 통한 외주를 주겠다고 선포하였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자동차매수인에게 자동차를 인도해 주는 등의 물류사업을 글로비스에게, 광고사업을 이노션에게 독점을 주다시피 하여 왔다. 글로비스와 이노션은 모두 현대자동차그룹의 정 회장 일가가 설립한 회사이고, 이 회사에 내부거래독점권을 줌으로써 실질적으로 재산상속을 해 왔다는 비판을 받아온 사실상의 현대자동차 내부회사이다. 그러니 다른 광고회사나 물류회사는 일감을 따낼 수 없고, 거의 독주체제를 통해 업계 최상위 회사로 급성장하였다. 현대자동차그룹의 이러한 내부거래줄이기운동은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경제민주화가 국민의 최대 화두가 되면서 이러한 내부거래를 사실상의 증여로 보아 중과세하겠다며 공정거래법을 개정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에 떠밀린 비자발적 행태인 것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내부거래축소움직임은 삼성으로, 엘지로, SK로, 한화로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이게 정치가 실현해야 할 정의의 실현인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소위 국정원녀불법선거개입사건, 소위 성접대비리사건 등에 수사가 제대로 마무리되고 있지 못한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정치가 정의로워지면 국가의 모든 길이 조용필의 바운스가 될 수 있다. Bounce, 바로 공이 바닥에 튕겨 튀어 오르는 현상처럼, 가슴이 콩당콩당 뛰는 현상처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공자가 정의했듯 “정치란 가까이 있는 자를 기쁘게 하며, 멀리 있는 자는 그리워서 따르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권의 정의실현 움직임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내 경제민주화에 대한 대통령선거 공약보다 앞서 나가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부담이 된다.”고 말을 해 버렸다. 그냥 여야 협상과정에 찬 물을 끼얹어 버린 것이다. 물론 대통령으로서 자신의 국정운영을 위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런 의견개진은 여당 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져야 할 사항이지, 공개적으로 야당에게 요구할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삼권분립원칙에 따라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은 국회, 다시 말해 야당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 공개발언을 들어버리면 야당은 오히려 반발할 수밖에 없게 되고 협상과정에서 고집쟁이로 바뀌게 되어 오히려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 부정적 효과로 나타나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앞으로 화법을 바꿀 필요가 있다. 여당에 해야 할 말과 야당에 해야 할 말이 다르고, 국민에게 해야 할 말이 다르다는 점을 인식했으면 싶다. 이는 자신의 말에 절대성을 부여해 온 생활습관에서 비롯된 언어습관이지 않을까 추측해보기도 한다. 상대가 있음을 인식했으면 싶다.


다양한 세상이다. 조용필의 바운스와 싸이의 잰틀맨이 공존하는 대한민국은, 그래도 아직은 아름답다. 속된 말로 싸이의 잰틀맨으로 뒷다마 까고, 조용필의 바운스로 가슴을 설레는 대한민국, 참으로 아름답지 않은가? 정치만 잘 되었으면 한다. 마라톤결승선에 폭탄테러가 없는 대한민국, 앞으로도 그런 안전하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이 계속 되었으면 한다. 오늘은 조용필의 바운스를 몇 번이나 들을 수 있을까, 가슴이 괜히 설렌다. 내 가슴이 콩당콩당 바운스 되는 것 알랑가 몰라. 같이 알아보지 않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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