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은 것과 이로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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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것과 이로운 것
  • 법률저널
  • 승인 2010.05.24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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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옳은 것과 이로운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옳은 것이라고 하여 항시 이로운 것도 아니고, 이로운 것이라고 하여 항시 옳은 것도 아니다. 두 가지가 같은 방향인 경우에야 얼마나 좋으랴만 다를 경우 우리는 당혹스럽다. 그렇다면 두 가지가 서로 다를 경우 옳은 것을 따라야 하는가, 아니면 이로운 것을 따라야 하는가? 현실은 이로운 것을 따를 일이고, 역사는 옳은 것을 따를 일이다. 한 몸에 두 지게를 질 수 없는 게 인간의 한계이기에, 옳은 것과 이로운 것이 일치하지 아니할 때 어느 쪽을 택해야 할 것인지는 언제나 우리에게 갈등이고, 넘어야 할 장벽이다. 왜냐하면 현실은 살아야 하는 것이고, 역사는 이루어야 하는 것이기에, 두 마리 토끼를 놓쳐서도 안 되고 이루지 않아도 안 되기 때문이다. 두 마리 토끼가 다른 길로 달음박질칠 때 쫓아가는 우리는 허덕거릴 뿐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살면서 역사를 이루어야 하고, 이루어진 역사 속에서 또 살아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언제나 이로운 것을 취하는 이들이 득세하게 되어 있다. 반면에 이루어진 역사는 언제나 과거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역사는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에서는 어떠한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힘을 가진 오늘이 올바름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과거를 무시할 경우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옳은 것을 지키고 실행하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옳은 것은 항시 뒷북을 치기 마련이고, 이로움은 약삭빠르고 약은 이들이 요령껏 갉아먹고 파먹고 훔쳐 먹기 때문에 옳은 것이 이로운 것을 단죄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로운 것은 취하면 취할수록 스스로 힘이 강해진다는 점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러한 현상을 너무 쉽게 학습 받고 있다. 그들이 즐겨하는 컴퓨터게임에서 매순간 그러한 힘의 논리가 활개치고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강한 무기가 필요하고, 이러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어린 청소년들이 엄청난 돈을 쏟아 붓고 있고, 심지어 그 돈을 마련코자 범죄마저 저지르는 경우도 있음을 종종 보게 된다. 오랜 세상을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들이 옳은 것보다는 이로운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진리(?)를 실컷 놀면서 배울 수 있는 판이 지천에 널려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어른이라고 무어 다를 게 있겠냐만은...... 

  세상은 힘을 가진 자가 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 관념 속의 신은 무소불위의 존재이다. 없는 곳이 없고, 못할 게 없다. 그러기 위해 신에게는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을 잃은 신은 이미 신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없다. 그렇다면 신은 넘쳐나도 좋은가?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가장 강한 신은 하나만 존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신이 넘쳐나면 신이 신을 인정하지 않게 되어 신끼리 전쟁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이 신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항시 올바름이 무엇인지 제대로 평가하는 “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신이 얼빠지게 되면 세상은 혼돈에 빠지게 된다. 다시 말해 신이 제대로 된 신이라면 세상을 혼돈에 빠뜨릴 것이 아니라 혼돈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바로잡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힘을 가진 그 신이 올바름을 평가할 책무를 포기하고 자신의 이로움을 좇을 때이다. 이미 이 세상에는 신들이 넘쳐나고 있다. 신들의 엄청난 직무유기가 벌어지고 있다. 거대 재벌, 거대 언론, 거대 집권세력, 거대 문화, 거대 학벌, 거대 수사기관 등 거대한 신들이 나름대로의 영역을 만들어 신의 나라, 신의 자식들을 양산하고 있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러한 거대한 신들이 이미 트러스트를 조직하여 독과점체제를 갖추어버렸다는 사실이다. 신이 하나만 있을 경우조차 미약한 인간이 그 광대한 힘 앞에 제대로 대항할 수 없을 터인데, 그러한 신들이 강한 카르텔을 형성하여 그 힘을 집단행사하고 있으니, 세상은 온통 틈새 없는 유리벽이 되어 버렸다. 유리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뻔히 보이는데도, 그 유리벽을 뚫고 나가 이를 시정할 힘이 약한 인간에게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이다.
  이러한 힘없는 이들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언덕은 역사뿐이다. 똑같이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도 역사는 그게 묘한 거라, 언제나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기록하는 뚝심이 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물이라고 한다. 그게 맞아왔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전유물이었고, 그들 입맛에 맞게 기록되어 왔으니까. 하지만 21세기 이후의 역사는 패자의 역사도 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공유화는 패자로 하여금 자신의 슬픈 역사를 기록하게 만들고 있다. 패자들은 수많은 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눈물로 쓰여진 기록들은 상처가 되어 흔적이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패자들은 쓰고 쓰고 또 쓰고, 자다가 일어나 또 쓴다. 쓸 것 이외에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없기에 역사를 믿고 역사를 쓴다. 그러기에 역사는 또 강하다.

  지난 19일, 태국의 레드셔쓰는 전격 진압작전을 펼친 태국군의 무차별 무력 앞에 결국 항복하고 무너졌다. 마치 30년 전 광주의 5.18 민주화투쟁이 전두환 군부세력에게 무너졌듯이. 몇 달 전 태국여행을 갔었을 때, 태국 서민들이 탁신 전 총리를 엄청 추종하는 것을 보고 의아해서 물어보았던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탁신 전 총리가 부정부패를 많이 저질러 군부구테타에 의해 쫓겨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그리 부정부패를 저질러 축출된 정치인을 지지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가난한 서민들을 위한 올바른 정책을 탁신 전 총리가 너무 많이 실시하였고, 국민을 진정 사랑하는 총리였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지금 자신들이 타고 다니는 시내버스가 공짜이거나 아주 저렴한 것도, 값싸게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도 모두 탁신총리가 실시한 파격적인 공공복지정책 때문이었다며, 이러한 정책을 과감하게 도입한 탁신이 기존의 소수 기득권층의 심기를 건드려 그들의 지지를 받은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기 때문에 자신들은 승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백 명이 사살되고, 수천 명이 총상을 입은 이번 태국유혈사태는 태국의 역사로 기록될 것이다. 십 수 년이 지난 후 광주사태가 폭도들의 만행으로부터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되었듯이, 태국에서도 그러한 재평가가 이루어질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루어질 것이다. 1980년 5월 18일이 우리의 역사가 되었듯이, 2010년 5월 19일이 태국의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제 20일, 지난 3월 26일 서해 백령도 근처에서 발생한 천안함 침몰사태가 북한의 어뢰공격에 의한 것이라는 정부의 공식발표가 있었다. 그동안 천안함 사태를 둘러싼 정부와 국방부, 군의 대응태세 등에 너무 많은 허점이 들어나고, 정보가 공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에 그 조사가 너무 정치적으로 이루어진 부실한 조사로 신뢰할 수 없다는 야당의 거센 반발이 있지만, 일단 2010년 5월 20일 현재 천안함은 북한 어뢰공격에 의한 폭발로, 우리 46명의 군인이 전사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역사가 나중에 숨겨진 다른 진실을 찾아내어 기록을 변경할지는 지켜볼 일이지만, 오늘까지의 역사로는 북한의 공격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국가안보에 관한 엄청난 사태이다. 정부와 여당은 지난 10년간의 문민정부와 참여정부의 대북퍼주기정책과 국가안보해이사태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변명이고 핑계일 뿐 전혀 맞지 않은 말이다. 왜냐? 천안함 침몰은 2010년 3월 26일 오후 9시 22분경에 발생한, 이명박 정권 하에서 벌어진 명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2년이 훨씬 지난 뒤의 일인데, 이 일을 2년 훨씬 전의 전 정부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설령 전 정부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국민의 선택에 의해 이미 심판을 받았으므로, 이를 넘겨받은 현정부는 현실적인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책임져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기에, 이번 사태에 대하여는 이명박 정권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 북한 잠수정이 우리의 초계함을 어뢰로 공격하여 폭파침몰시킬 동안 우리 정부는, 우리 군은 도대체 무엇을 하였다는 것인가?

  1999년 6월 15일에 있었던 제1차연평해전, 2002년 6월 29일에 있었던 제2차연평해전은 모두 우리 해군의 승리였다고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줄곧 주장하여 왔다. 북한의 도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올바른 대응으로 우리가 혁혁한 승리를 얻었다는 것이다. 그래 그 말이 맞다고, 북한의 도발에 대해 우리가 승리하였다고 치자. 그렇다면 1999년 제1차연평해전과 2002년 제2차연평해전에서 승리한 정권은 어떤 정권인가? 그렇게 대북퍼주기정책을 하였다며 비난받은 김대중 정권 때가 아닌가? 김대중 정권 때는 두 차례의 해전을 모두 승리로 이끌었는데, 대북퍼주기정책을 중단한 이명박 정권은 그때 해전에 비하면 엄청난 큰 규모의 피해가 발생한 천안함피격사건에서는 대응조차 못한 채 패전을 했다. 사태 당시에는 쳐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렇다면 적을 물리쳐 적선을 가라앉히거나 퇴패시켜 승리한 김대중 정권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아니면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천안함을 두 쪽으로 동강내 침몰시키고 46명의 목숨을 순식간에 앗아가게 하여 패배한 이명박 정권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가? 당연히 후자가 아닌가? 뭣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비난한다는 속담의 이치도 모르는가?

  병서에 전쟁에 진 자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경계에 진 자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이번 천안함 사태는 전형적인 경계에 진 경우이다. 책임 라인에 있는 관계자들을 군법회의에 회부하고 엄중 처벌해야 한다. 단순한 인사조처로 전역이나 시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엄청난 직무유기이고, 국민의 생명과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해당 군관계자들은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고, 총리를 비롯한 국방부장관, 안보부서 책임자 등은 정치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어떻게 전쟁에서 지고 이렇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가? 당장 처벌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가해자인 북한을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정책을 써 국가를 전쟁분위기로 몰아가서는 결코 안 된다. 형법상 정당방위가 인정되는 경우는 가해에 대한 즉시성이 있을 때뿐이다. 즉 지금 가해하는 자에 대하여 자신이나 타인의 생명이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현재의 반격을 허용할 뿐, 몇 시간이 지난 뒤의 가해에 대하여도 우리 대법원은 정당방위로 인정할 수 없다며 피해자의 뒤늦은 가해를 별도의 범죄로 보아 형벌로 처벌하고 있다. 국제법 역시 같은 논리에서 천안함사태 발생 후 두 달이 지난 현재 어떠한 무력적 응징행위도 별도의 전쟁유발행위로 볼 뿐 정당한 자위권의 행사로 보지 않는다. 따라서 유엔 등 국제기구를 통한 국제법절차에 따라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미국이나 일본 등 우호적 동맹국가들의 지원을 얻어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이전에 책임자들을 먼저 문책해야 한다. 내부를 다지고 외부에 대처할 일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군최고통수권자로서 국민 앞에 머리 숙여 사죄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수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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