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의일기]종중과 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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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의일기]종중과 중종
  • 법률저널
  • 승인 2002.08.28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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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1학년인 윤지는 한동안 ㅊ을 쓸 때 ` 을 찍고 ㅈ을 쓰는 것이 아니라, ㅗ를 쓰고 그 밑에 ㅈ을 썼다. '동물뉴스'의 심현섭 말마따나 글로는 잘 표현이 되지는 않지만, 가로선(-) 하나가 중복되어 재미있는 모양이 된다. 지금 생각해보니 윤지에게는 ㅎ과 ㅊ이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ㅇ위의 ㅗ(  )와 ㅈ위의 ㅗ(  ). 그 시절 윤지는 숫자 10을 한글 '이'처럼 01로 적었다. 1부터 10까지를 반복하게 하면 그 부분이 이렇게 된다. ... 7 8 9 01 1 2 3 ... 그런데 신기한 것은 내가 찬찬히 ㅊ을 쓰고 또 1부터 10까지 써준 다음 다시 쓰게 해도 자기 스타일대로 똑같이 쓴다는 것이었다. 윤지 눈에는 그게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유행가 가사 같다. "...처음 받은 그 느낌 그대로..."

 

 과학철학자 핸슨(N. R. Hanson)은 그의 책 {과학적 발견의 패턴}에서 관찰과 실험 그리고 그것에 근거한 결론이 얼마나 인간의 주관에 의해 좌우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want to see) 과 볼 수 있는 것(can see)만 본다는 것이다. 눈이 녹은 자리를 찍은 항공사진이 예수의 얼굴로 보이는 것은 그것을 예수의 얼굴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강공주, 평강공주'를 반복시킨 다음 "자명고를 찢은 사람은?"이라고 물으면 무심결에 평강공주라고 대답을 하고, 또 '낙랑공주'라는 단어를 반복한 다음 평강공주 이야기를 글로 써 놓고 그 속의 주인공을 낙랑공주로 슬쩍 바꿔 놓아도 틀린 것을 모르고 읽게 된다. 사법시험 공부를 하면서도 그런 경우를 가끔 본다. 일전에 테이프로 접한 한 유명강사도 '종중(宗中)'을 '중종(中宗)'으로 읽고 있었다. 씨족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권리능력없는 사단과 조선조 11대 왕은 전혀 연관성이 없는데, 얼마전 우리 스터디원 중 한 사람도 그렇게 읽었다. 묘하게도 그 후배가 사학과 출신이다.

 

 사랑을 하든 언어를 배우든 '최초의 충격'이 매우 중요하다. 처음 접할 때의 신선한 그 느낌이 오래 가는 것 같다. 이것을 고시공부에 적용시켜보면 일단 공부를 시작했으면 '처음에 제대로 해라'라는 교훈이 도출된다. 특히 처음 공부할 때 나처럼 직장과 공부를 병행한다든지, 연애와 공부를 반반씩 한다든지 하는 것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1회독과 1년차 고시생의 시절은 금방 지나가고 '본 것 같기도 하고 안 본 것 같기도 한' 2회독과 2년차 시절이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고시공부를 시작할 때는 사전 정지 작업을 철저히 한 다음, 일단 시작한 후에는 공부에만 몰입해야 장기기억으로 연결되는 좋은 '선입관'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사자(死者)명예훼손'을 '사자(使者)명예훼손'으로 오해하는 것 등은 금방 바로 잡을 수 있고 합격에도 아무런 지장이 없다. 윤지가 0으로 대표되는 10진수의 의미를 알기만 하면 10을 거꾸로 쓰는 것은 문제가 없고, 그 후배가 종중과 관련된 민법의 여러 쟁점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그걸 잘못 읽는 것은 부차적인 것이다. 고시공부에서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아는 것도 헷갈리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나는 규범통제와 합헌적 법률해석의 차이에 대해 꼼꼼하게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공부가 되어 있지만, 친구가 불쑥 "합헌적 법률해석은 헌법의 효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면 무심결에 "yes"라고 대답한다. 친구 말에 의하면 2달 전에도 똑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어제는 친구가 "갑(甲)과 을(乙)이 살인을 공모하고 동시에 실행에 착수했는데 누구의 구타에 의해 살인의 결과가 발생했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갑과 을의 죄책은?"이라고 기습질문을 했다. 문제를 들으면서 나는 상해죄의 동시범 특례가 살인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생각에만 매몰되어서, 형법 제19조가 적용되는 '살인미수'라고 대답을 했다. 계속 이러면 문제가 심각하다.

 

 이제 윤지는 자음 'ㅁ'을 쓸 때 각진 동그라미를 그리듯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참치가 춤췄다"도 안 틀리고 쓸 줄 알고, 그 단계를 넘어 엄마 핸드폰으로 나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1년만의 변화다. 종중을 중종으로 읽었던 올해 공부를 처음 시작한 후배는 스터디 1달만에 진도별 모의고사에서 나랑 동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쑥쑥 커가는 아이나 무섭게 질주해 오는 후배들은 내게 엄청난 자극이 된다. 후배보다 연수원 기수가 늦는 일은 없겠지. 그리고 설마 내가 공부하다 그만두고 윤지가 아빠의 한(恨)을 불사르기 위해 고시공부를 하는 그 날이 오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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