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복 판사의 세상보기-명분과 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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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복 판사의 세상보기-명분과 실리
  • 법률저널
  • 승인 2008.11.2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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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사건의 조정은 해 볼수록 흑백논리에 따른 명철한 판단보다는 명분과 실리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명분을 찾아 주거나 실리를 챙겨주다 보면 때로는 예상 밖의 조정이 성립된다. 판결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분쟁해결도 가능하고, 계류된 사건의 소송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분쟁까지 일거에 해결할 수도 있다. 입증이 곤란하거나 입증을 하지 아니 하여 도저히 판결을 할 수 없는 난감한 사건도 그저 간단하게 종결지을 수가 있다.

 

소액사건에서 조정이 더 그 마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쩌면 법에 무지하거나 법에 익숙하지 아니한 생활을 하여온 당사자본인사건이 많아서인지는 모른다. 보통사람들은 참으로 순박하고 인정이 있고 양보심도 많다. 그리고 대개는 판사의 권유에 호의적이다.

 

친구 간이나 이웃 간의 싸움사건은 태반이 감정싸움이다. 손해를 물어주면 잘못을 시인하는 꼴이 된다는 자격지심이 있다. 그래서 여간해서는 합의가 되질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국 자존심 싸움이다. 속마음은 누가 좀 말려주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나서서 적극적으로 중재하지 않다보니 소송에 이르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 얼굴에 이러한 속마음을 드러내는 당사자도 더러 보이기도 한다.

 

판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화해적 해결을 시도하면 대개는 조정이 성립된다. 필자가 그간 담당하였던 사건을 되돌아보더라도 싸움으로 인한 손해배상사건은 태반이 조정되었다. 대개는 과실여부는 따지지 아니하고 치료비 등의 실지로 입은 손해를 물어주는 선으로 조정안을 제시하였다. 사안이 작아서인지 몰라도 조정이 성립되지 않은 사례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정을 성공시키려면 싸움이란 대개가 쌍방과실이라는 점과 이로 인한 과실상계를 하게 된다는 점을 알려주고, 다친 정도가 심하지 아니하다면 과실상계를 하지 않는 대신 위자료 청구는 감안하지 말고 원상회복을 위하여 실지로 입은 손해만을 물어주는 선으로 조정하라고 권하는 것이 좋다. 대개가 응하였다.

 

다소 불만스러워도 조정에 응하는 이유가 있다. 법정에서 공방을 하는 것이 괴롭고 부끄럽기 때문이다. 형사사건으로 조사된 사건은 그래도 덜하나 그렇지 아니한 사건은 동네사람이나 다른 친구들을 증인으로 세워야 하는 부담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격분하였던 감정이 가라앉아 물러설 구실을 찾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타이밍만 잘 맞추어 적당히 물러설 명분을 주면 슬그머니 조정에 응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건은 비단 싸움사건만이 아니다. 특히 정의관계나 오랫동안의 거래관계에 있던 사람들이나 작은 교통사고와 같이 손해배상보다는 감정적인 분쟁의 성격이 짙은 사건은 모두 해당된다. 적당한 명분만 주면 조정이 쉽게 이루어진다.

 

실리를 챙겨주어야 할 사건은 소송목적의 값이 적으면서도 입증에 있어 어려움이 있거나 입증을 위한 소송비용이 과다하게 부담되는 사건 등이다. 승소판결문을 받더라도 상대의 형편상 집행가능성은 없고, 다만 이해관계인이 일부라도 물어주겠다고 나서는 경우에는 더욱 실리를 챙기는 것이 현명한 선택임을 지적하여야 한다.

 

판사의 역할이 지대하다. 입증상의 어려움이 무엇인지 자세히 설명하고 소송비용에 대하여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여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나 조정과 판결 중 어느 쪽이 유리한지를 판가름할 수 있기 때문에 원하는 조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명분과 실리는 사건의 화해적 해결에 있어 매우 유용한 방편이다. 때로는 미끼가 될 수도 있고, 때로는 마중물이, 때로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판사로서는 꽉 닫힌 당사자들의 마음을 열어 대화를 유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쌍방 간의 물꼬를 트는 역할은 바로 이러한 명분과 실리가 할 수 있다. 조정은 명쾌한 판가름이 아니라 양보와 타협이기에 바로 이러한 융통성을 발휘하는 수단이 필요한 것이다.

 

유재복 판사는...

現 대전 지방법원 금산군법원 판사
「늦깎이 시골판사의 세상보기」
「시골판사 유재복, 더불어 행복을 찾는 지혜」저자
·대전에서 소위 '잘 나가던'변호사였던 그는 2001년 시골판사 생활을 자청해 현재까지 대전지방법원 금산군법원 판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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