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 문벌(門閥)의 폐해는 이미 옛 현인들에 의해 하나의 정론(定論)으로 되어 왔으므로 다시 이 자리에서 말할 바는 없으나, 중국에서는 송나라 이래로 출신의 높고 낮음에 따라 사람을 기용하는 법이 없는데, 우리나라만이 홀로 고려의 폐풍(弊風)을 이어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런 대로 조선 초에는 사람을 능력에 따라 기용하려는 뜻이 있어서, 훌륭한 인물들이 한미(寒微)한 집안에서도 배출된 바 있었으나, 근래에 이르러서는 문벌에 치우치는 기운이 높아 옛날로 되돌아가고 있는 듯하다.
문벌 있고 세력 있는 사람들은 그 세력을 믿고 교만, 방자할 뿐만 아니라, 뜻을 오로지 부귀에 두어 기운이 절로 넘치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제자나 친분 있는 고관들과 혼인을 맺어 그들의 집안으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그들의 뜻대로 사람을 기용하며, 관직을 그들 스스로의 것인 양 나누어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조금이라도 배척되기만 하면 이들은 흉악하게도 나라를 원망하고 임금을 업신여기는 가운데 그 오만하고도 완고한 습속(習俗)으로 멋대로 횡포를 부리니, 나라의 공론(公論)으로도 그 기세를 꺽지 못하고 나라의 형벌도 그 폭거를 징계하지 못하고 있다.
15. 이 글에 나타난 글쓴이의 태도는?
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다.
② 사태의 해결을 낙관하고 있다.
③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④ 사회 현상을 객관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16. ㉠의 예를 이 글에서 추리할 때,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왕권을 약화시킨다. ② 능력 있는 인재가 소외된다.
③ 나라의 기강이 문란해진다.④ 지방의 향리가 득세하게 된다.
(가) 千世(천 세) 우희 미리 定(정)샨 寒水(한수) 北(북)에, 累 仁開國(누인 개국)샤 卜年(복년)이 업스시니, 聖神(성신) 이 니샤도 敬天勤民(경천 근민)샤, 더욱 구드시리이다.
우중충한 그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금 며느리는 아이에게 젖을 물린 채 다림질을 하고 있다. 방에 있던 시어머니가 말을 건네 온다.
“아가, 할미가 업어 줄까?”
이 말은 할미가 젖을 빠는 손자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비가 뿌리는 밖에 널려 있는 빨래를 빨리 거둬들이라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하는 분부인 것이다. 며느리는 그 말을 통찰력으로 알아듣고 빨래를 거둬들인다.
텃밭에 가 남새 뜯어 국거리 마련하랴, 저녁밥 지으랴, 애들 돌보랴, 일손이 바쁜 며느리는 시어머니 담배 피고 있는 방 앞에서 강아지 배를 차 깨갱거리게 하거나 마루에서 노는 닭들에게 앙칼스레 욕을 퍼붓는다. 시어머니는‘옳거니.’통찰로 그 뜻을 알아차리고 바구니 들고 남새밭에 가면 되건만, 그렇지 않아도 좀 쉬었다가 텃밭에 가려고 했는데 강아지 배를 차……. 어디 가나 보라.’고 버티고 있으면 며느리는 업힌 아이보고,
“니 어머니는 무슨 팔자로 손이 세 개 달려도 모자라냐.”
고 혼잣말을 한다.
이 같은 통찰을 필요로 하는 대화를 서구식으로 통찰을 필요로 하지 않는 대화로 통역하면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나는 아이 업고 밥짓기가 바쁘니 나를 돕는 뜻에서 바구니 들고 남새밭에 가 국거리 좀 뜯어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응, 그러마. 나 지금 담배 한 대 피고 있으니 다 피면 나가려고 하고 있다. 약 5분만 기다려 다오.”
“좋아요. 5분 후에는 약속대로 이행해 주시길 바래요. 꼭요.”
“알았다. 그렇게 하마.”
가정에서부터 나라라는 큰 집단까지 한국인은 너무 많이 통찰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다. 이 통찰이 부드럽게 이뤄지면 빨래 걷는 며느리처럼 충돌 없이 행복하게 영위가 되지만, 남새밭에 가지 않는 시어머니처럼 통찰이 어긋나면 증오와 불화가 빚어진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지피는 장작불의 조잡함에서, 며느리가 먹인 시어미 삼베고쟁이의 칼날같이 뻣센 풀에서 며느리의 반항을 통찰할 줄 알아야 한다. 며느리가 업고 있는 아이의 울음의 질과 시간과 때와 경우를 판단하여 며느리가 아이 엉덩이를 꼬집어 울린 건지 아닌지를 통찰로 감식할 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꼬집어 울리는 아이의 울음이나 배를 차서 울리는 강아지의 울음은 불만이 차 있는 며느리의 절규를 ㉠ 대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플라스틱이라 소리가 나지 않지만 바가지 요란하게 긁는 것이, 통찰이란 미디어를 통한 강력한 발언인 것이다. 한국인은 이렇게 눈이나 귀가 입보다 말을 많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