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집단가학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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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집단가학시대
  • 법률저널
  • 승인 2007.09.21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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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봉체조라는 것이 있다. 무거운 봉을 여러 사람이 함께 들어 올리는 체조 말이다. 말이 체조지 실제로는 사람의 근육을 발달시키기 위한 격한 신체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고통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악명 높았던 삼청교육대에서 지긋지긋하게 시켰던 훈련 중의 하나가 봉체조라고 한다. 한국의 대부분 남자들은 군에서 봉체조 훈련을 받은 기억이 있다. 숙달된 조교는 언제나 두 편으로 나눠 한 편이 정신 하면, 다른 편이 통일 하고 맞구호를 주고받도록 하고는 했다. 구호에 따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는 봉체조는, 짧은 시간 훈련을 받더라도 봉의 무게에 눌려 초주검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봉체조 훈련을 시키는 교관은 집단 구성원들에게 하나로 뭉쳐야 한다는 정신력 함양과 어떠한 고난도 함께 헤쳐나가야 한다는 강인한 체력을 갖추도록 하기 위해서는 봉체조만한 훈련이 없다고 강조한다.


봉체조는 모두가 협동하여야만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들여다보면 봉체조에도 얼마나 많은 모순이 있는지 모른다. 실제로 봉체조 훈련에는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 경우에 따라 유리하기도 하고 불리해지기도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엄한 교관 밑에서 훈련을 받다보면 키 큰 사람이 제일 힘들다. 왜냐하면 가장 높이 들어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키 작은 사람은 키 큰 사람이 낑낑거릴 때 힘 하나 안 들이고 손만 들어 올리면 되어 전혀 힘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짓궂은 구성원은 밑으로 잡아당겨 동료의 힘을 빼놓기도 한다. 반대로 조금 느슨한 교관 밑에서 훈련을 받는 경우는 키 작은 사람이 죽어난다. 키 큰 사람은 키 작은 사람이 온 힘으로 들어 올리는 순간 드는 시늉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중간 정도 키의 사람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거나, 아니면 이래도 나쁘고 저래도 나쁠 수 있기도 하다. 결국 그 무거운 봉체조도 사람 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봉체조에서 앞, 중앙, 뒤 중 어디에 서는가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혜로운 교관이라면 봉체조하는 이들을 키순으로 앞에서부터 뒤로 세우거나 반대로 세워 모두가 골고루 힘을 쓰도록 만들겠지만 그렇지 않은 교관은 대원들을 아무렇게나 세워 누군가를 녹초로 만들고 불공평을 조장하고는 한다.


뜬금없이 봉체조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러한 봉체조가 난무했던 20세기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이 철저하게 현실화되는 과정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아니 21세기는 잔인하다할 정도로 집단가학시대라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강제된 협동정신이 빛을 잃으면서 산업화 물결 속에서 철저하게 고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20세기형 인간들이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철저하게 개체화된 자신들을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멸치 떼처럼 인터넷을 떠돌며 집단가학증세를 보이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기이한 집단현상을 하나 볼 수 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손전화기를 들고 신나게 놀고 있는 현상 말이다. 모두가 엄지족이 되어 그 좁은 글자판 위에서 놀고 있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집단증후군을 발견하게 된다. 이동통신이 제공하는 모바일 동영상을 보거나, 손전화기를 통해 대화를 나누거나, 아니면 음악을 듣는 등 잠시라도 뇌를 쉬게 하면 무슨 큰 재앙이라도 되는 듯 무언가 흥밋거리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훈련을 매순간 받고 있음을 본다.


예전에 봉체조로 연결되던 집단훈련이 개체화된 인터넷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모두가 독립적이면서도 모두가 전산망으로 연결되어 일체화되어 있는 묘한 구조 속에서 무슨 흥밋거리가 하나 생겼다 하면 우르르 몰려가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졸지에 공격의 타게트가 되어 버리면 그는 순식간에 육식 물고기에게 집단 뜯김을 당해 뼈만 앙상하게 남는 물고기 신세가 되고 만다. 손 쓸 틈도 없이 졸지에 발가벗겨져 만신창이가 되고 만다. 하지만 히히덕덕거리며 공격의 칼날을 세우던 멸치 떼들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혼자만의 일상으로 돌아와 초개체화의 은둔 속으로 잠적해 버린다.


그림자가 빛을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제 세상에 권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그 동안 현명의 세상에 최소한의 규범으로 존재하였었지만, 이제 현명의 세상에서조차 권위가 통용되지 않게 되고 말았다. 대통령의 권위가, 종교지도자의 권위가, 스승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버린 현명의 세상, 더군다나 보편화되어버린 익명의 세상에서 어찌 권위 운운할 수 있겠는가? 모두들 방종에 가까운 자존의 완장을 차고 시도 때도 없이 휘슬을 부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인터넷 게시판은 모든 네티즌들에게 심판이라는 완장을 채워주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휘슬이 울려대고 있다. 모두가 선수이고 모두가 심판인 세상, 거기에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규칙이 없다. 인간 의식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말초적 본능이 예의염치에 의해 그나마 유지되어 왔으나, 이제 그 자제력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은 세상이 되어버렸다. 말초적 짜릿함이 있으면 충분하다. 웃기는 일이면 충분하다. 자극적이면 더 좋고 엽기적이면 더 더욱 좋다. 갈수록 마약중독자가 늘고, 갈수록 알콜중독자가 늘고 있다. 섹스중독자가 늘고 일중독자가 늘고, 게임중독자가 는다. 그들 폐인을 추종하는 자들이 늘고 동질감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의 주체성을 포기한다. 스스로에게 칼질을 해대는 자들도 늘어나고 있다. 자폐의 늪에 빠져 스스로를 공격하는 자,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고 자신의 정수리에 못을 박는다.


집단가학증후군의 폐해는 심각하다. 힘을 가진 자들은 가진 자들끼리 뭉치고, 힘이 없는 자들은 힘이 없는 자들끼리 뭉친다. 문제는 그 집단의 분류가 수시로 경계를 허문다는 점이다. 모든 집단의 형성이 일시적이고 일회적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엄격히 구별되지 않는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은 척결의 대상이고, 어제의 우군이 오늘의 적이 되어 날을 세운다. 문제는 이러한 혼돈의 타임 갭(time-gap)이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속도의 템포에서 낙후되지 않기 위해 모두들 집단적으로 몰려다닌다. 문제는 그 집단 속의 개체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고, 그들로부터 동료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존재 속에서 철저한 부존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의 부존재와 부존재의 존재가 함께 존재하는 세상은 비극이다. 거기에 그림자에 공격당하는 햇빛이 있다. 집단가학시대에는 타인을 위한 눈물이 없다. 당신은 언제 마지막으로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렸는가? 집단가학시대를 살아남기 위해 당신은 오늘 또 누구를 향해 칼을 갈겠는가? 부디 칼집에 칼을 꽂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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