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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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7.08.03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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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인본주의와 신본주의
 
연일 폭염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병원에는 감기 환자가 넘쳐난다고 한다. 날이 덥다 보니 에어컨을 사정없이 틀어대어 냉방병형 감기에 걸린 환자라는 것이다. 올여름 거실 에어컨을 한 번도 틀지 않은 아내의 고집이 마침내 꺾이고 말았다. 아들 방에 아주 소형 에어컨을 새로 설치한 것이다. 방학 중인 아들은 더워서 공부를 제대로 못 하겠다고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야단이고, 아내는 밖에서 뙤약볕 아래에서 일하며 힘들어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집안에서 가만히 있으면서 에어컨을 트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며 못 틀겠다고 하여 서로의 주장이 계속 부딪히더니 결국 타협점으로 가장 작은 소형 에어컨을 아들 방에 새로 설치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전기료 아끼려다 새로운 에어컨을 사는 것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지출이 아닐까 싶지만 일 저지른 아내에게 잘 했다고 했다. 거실에 있는 큰 에어컨을 트는 것보다 작은 에어컨을 형편에 맞게 설치하는 것,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적응하는 순연의 모습이 좋아서이다. 그러면서 아내는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게 납치되어 있을 젊은이들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한다. 더운 곳에서 갇혀 고생하고 있을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아들 방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것이 미안하다고 한다.


세상은 그런 것인지 모른다. 내 손가락 끝의 작은 가시에 아파 어쩔 줄 모르면서 누군가 죽을 병에 걸렸거나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큰 고통에 대하여는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것 말이다. 남의 고통은 모두 강 건너 불이 되어 버린 세상에서 우리는 이 곳은 안전하겠지 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이 곳 역시 안전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탈레반에 피랍되어 그들이 무사귀환을 바라는 전 국민의 안타까운 기도가 계속되고 있지만, 그들의 생명처럼 소중한 또 다른 생명들이 오늘도 교통사고로 무의미하게 수십 명씩 죽어가고 있고, 즐겁게 물놀이를 갔다가도 하루에 십여 명 가까운 사람이 익사사고를 당하고 있다. 탈레반에게 납치된 자의 생명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출근길,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운명을 달리 하는 이도 소중하기는 마찬가지이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죽는 환자의 생명 또한 마찬가지로 소중하다. 국내는 안전한 듯 하지만 하루에도 살인범에게 억울하게 살해당하는 자도 얼마인지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여행을 떠난 젊은이들 및 샘물교회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만만치 않다. 국가가 위험지역이니 재고해 줄 것을 요청했고, 많은 이들이 우려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선한 일이니 행하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지역을 찾아갔고, 혹시나 하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으니 국민들의 그들에 대한 비난이 힘을 얻는 것이다. 아마도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기독교계는 많은 반성을 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문명사회 판단의 척도가 통하지 않는 나라가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음을 심각하게 깨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필자가 언급한 바 있지만, 지나치게 신본주의를 앞세우다 보면 인본주의를 무시하게 되고, 인본주의가 무시되는 곳에는 인간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는 신본주의가 꿈꾸는 지상의 천국이 아니라 곧 바로 지옥의 시작인 것이다. 기독교가 흥하여 교권이 왕권을 지배하던 중세 유럽을 일컬어 암흑시대였다고 역사가들은 기록하고 있다. 로마 교황이 지상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시절, 곳곳에서 마녀재판이 이루어졌고, 많은 이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처형되었다. 사람을 살리는 종교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종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종교를 지키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은 종교의 본연의 자세는 사라지고 자신의 그 전 행동에 대한 복수를 막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일념에 더 악독한 악행을 저지르는 것이 우매한 종교지도자, 정치지도자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역사의 기록들이다. 이는 모두 인본주의가 상실된 곳에서 비롯된 신본주의의 악행인 것이다.


나는 황당할지 모르지만 이런 꿈을 꿔본다. 피랍된 그들이 선교여행을 간 것이면 순교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떳떳하게 선교여행을 온 것이라고 밝히기를 말이다. 성경은 바울 사도는 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자 사슬이 풀리고 옥고의 문이 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하나님이 보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드락, 메삭, 아반드고는 펄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졌어도 하늘의 천사가 그들을 지켜줬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기독교를 전파하러 왔다가 최초로 순교를 했다. 유교사상으로 무장되어 있던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교리는 황당했을 것이기에 혹세무민의 가르침에 대한 응징으로 처형당한 것이다. 신라 법흥왕 때 불교를 전파하던 이차돈 역시 민속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던 당시의 지배계층에 의해 순교를 당했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신념을 꺾도록 강요당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가족이 들으면 분노할지 모르겠지만, 신념을 위해 죽는 일은 위대하다. 죽음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은 그 직전까지 자신들이 주장했던 가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이 되어 얼마나 비참한가 말이다. 그들의 희생은 나중에 또 다른 한 차원 높은 세상을 향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주문모 신부의 죽음이 우리나라에 가톨릭을 전파한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슬람근본주의학생들로 구성되었다는 탈레반도 이제는 그 본연의 자세를 상실했다. 그들이 내세우는 종교의 신념들은 인본주의를 상실했고, 이는 이미 종교라고 볼 수 없는 광신적인 집단에 불과하다.


나는 또 꿈꾼다. 우리나라 특전사 요원들이 아프가니스탄으로 건너가 비밀작전을 펼쳐 그들 모두를 무사히 구출해 오는 꿈을 말이다. 잘못한 자에 대하여는 응징이 필요하다. 그게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여기에서 발을 동동 구른들 눈 하나 깜짝 하겠는가? 그들이 생존한 스물한 명을 살려 보낸다 하더라도 이미 두 명을 살해한 그 책임을 묻지 않아야 하는가 말이다. 나는 계속 꿈꾼다. 우리 한국군이 그들을 응징하는 꿈을. 그리하여 세계 어느 나라도 우리나라 국민에 대하여 함부로 대하지 않기를, 존경심을 가지고 대할 수 있기를.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겸손해지기를 바란다. 자신을 신격화해가는 많은 종교지도자들에게 이번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의 교훈은 올바른 선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모르지, 여전히 쇠귀에 경 읽기가 되고 말 것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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