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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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7.07.27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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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승부차기

 

한국축구국가대표팀이 승부차기에서 한 번은 웃고 한 번은 울었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립경기장에서 치러진 2007년 아시안컵 8강전에서 이란에게 승부차기로 이겨 간신히 4강에 오르더니 준결승전에서 이라크에게는 승부차기로 졌다. 연장전까지 이어진 120분간의 열전 끝에 양팀은 무승부를 이뤘고, 승자를 가려야 하는 토너먼트경기의 속성상 승부차기를 통해 이기고 지고 했다. 결국 확률 반의 원칙이 작동한 셈이다. 두 번을 다 이기면 우리야 좋겠지만 그런 결과가 우리에게 반드시 주어진다면 이 또한 불공평하지 않겠는가?


키퍼와 마주 선 키커, 키커와 마주 선 키퍼는 승부차기에 직면했을 때 숨이 막힐 듯한 긴장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실축이냐 성공이냐에 따라서 환호할 것이냐 아니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냐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역적이 되기도 하고 영웅이 되기도 할 그 갈림길, 채 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승패가 결정되는 승부차기야말로 우리네 인생 아니겠는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맞이하게 되는 승부차기의 순간에 우리는 승자가 되기도 하고 패자가 되기도 한다.


승부차기를 직면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 월등히 실력이 뛰어나면 경기에서 항시 이길 것이므로 승부차기를 만나지 않겠지만, 어디 인생이 항시 뛰어난 실력으로만 살아갈 수 있겠나? 상대 팀도 피나는 노력을 할 것이고, 골 운이 따르지 않아 들어갈 듯 들어갈 듯하면서도 골이 들어가지 않을 때가 어디 한 두 번이겠는가?


한때는 한국 기원의 모든 기전에서 최고에 올랐던 이창호 프로기사가 이제는 KT배 왕위전 하나만을 가지고 있다. 물론 왕위전을 12연패한 대기록을 달성하였지만 최근 들어 이창호 기사가 바둑에서 자주 지고 있다. 한때 많은 프로기사들이 이창호 왕위 앞에만 서면 기가 죽고 주눅이 들어 이기고 있는 바둑도 지고 있는 듯한 위압감을 느꼈다고 술회하고는 했다. 그렇지만 젊은 신예들이 이창호의 바둑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고, 그 젊은이들이 이창호를 이기고 있다. 이는 젊은이들의 도전의식과 이창호 기풍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승부의 세계에서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이창호 왕위가 돌부처라는 별명으로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도 좋았지만(실력으로 승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 모습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이제 젊은 후배기사들에게 지면서도 의연히 대국하는 이창호 왕위의 모습도 좋다. 그게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질서이기 때문이다.


승부차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감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키커가 키퍼에 비해 유리하다. 계산상 각도만 맞추면 키퍼가 키커의 공을 잡을 수 없는 빠르기로 키커가 공을 차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섯 명의 승부차기를 넘는 경우가 별로 없다. 한두 명은 거의 실축을 하기 마련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끝내 분당 샘물교회의 배형규 목사가 피살되었다는 비보가 전해져왔다. 탈레반에게 납치되어 간 23명의 한국인 중 한 분이다. 순수한 종교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아프가니스탄인들을 돕기 위해 봉사활동에 나선 착한 사람을 아프가니스탄인인 탈레반이 이유 없이 납치했고,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수감 중인 동료 탈레반을 석방해 달라고 요구하더니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무고한 이를 살해한 것이다. 이렇게 선을 악으로 갚고, 선도 악으로 결말지어질 때 신을 의심하게 된다. 신은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 길이 신의 뜻일 수도 있기에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게 또 우리네 인간이다.


물론 탈레반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1979년에 소련에 의해 무고한 침공을 당하고 공산정권이 들어선 이후 1989년 소련군이 철수했지만 1992년 이슬람 반군인 무자헤딘에 의해 공산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끝없는 내전에 시달리더니 1996년 탈레반이 정권을 잡았지만 다시 2001년 미국의 침공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 탈레반으로서는 다시 정권을 되찾아 무슬림의 가르침에 충실한 이슬람근본주의국가를 만들겠다며 미국 등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를 상대로 악전고투의 전쟁을 치루고 있으니,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를 철군시키기 위한 압박수단으로 무고한 외국인을 납치하거나 살해하고, 자살폭탄테러를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다. 210만 명이나 되는 난민들이 매 끼니를 때우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는 아프가니스탄에 언제쯤 평안과 안식이 도래할 수 있을까? 30년간의 전쟁 끝에 남겨진 것은 끝없는 기아와 질병뿐이니, 인간의 어리석은 단면을 보는 듯 하다.


21세기는 문명충돌의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버드대학교 교수 새뮤얼 헌팅턴(Samuel Huntington)이 예측한 바 있지만, 이슬람문명이 현대화되기까지는 이러한 충돌현상은 지구상 곳곳에서 전개될 것으로 예측된다. 종교가 내세우는 최고의 가치는 사랑과 자비이다. 문제는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적대한다. 사랑을 이루겠다며 전쟁을 하는 모순, 그게 우리네 인간이다. 종교는 인본주의를 뛰어넘는 신본주의의 세계이다. 그렇지만 인본주의를 뛰어넘는 신본주의는 인간을 죽이는 종교로 전락하고 만다. 신조차도 인본주의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평안해진다. 이는 신본주의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신본주의를 해석하는 인간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빚어진 비극이라는 말이다. 인본주의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자가 자기 멋대로 신본주의를 맹신하게 될 때 그곳에는 배타적이고 맹신적이며 인간 생명 경시라는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이 벌어지게 된다. 낡은 이론이 되어 버렸지만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은 각자 알아서 해결하도록, 그 해결을 돕기 위해 총이 아닌 사랑과 사랑이 담긴 구호물품을 보낼 때 진정한 의미의 민족자결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민족자결을 부르짖는 자들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살상을 전파하는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들이야말로 나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 강대국 소련이 침공하지 않았다면, 미국이 침범하지 않았다면, 그들 내부에서 싸우다 타협하고 말았을 것이다.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빨리 끝날 수 있는 분쟁을 개입함으로써 더 장기적이고 확대된 비극으로 치닫게 하는 게 잘못된 선진국식 해결방법이다. 자기들끼리 해보고, 자기들끼리 스스로의 잘못을 반성하게 될 때 거기에 뒤늦지만 항구적인 평화가 찾아오게 될 것이다.


아직 석방되고 있지 않은 나머지 분들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배형규 목사의 명복을 빈다. 하늘나라의 안식이 그에게 임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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