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
상태바
오시영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7.07.20 10: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수채화와 유화

 

어린 아이들은 처음에는 연필로 그림을 그리다, 크레파스화로, 파스텔화로, 수채화로, 유화로 옮겨간다. 크레파스로 그려진 그림은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조잡하고 미숙해보이지만, 어린 아이들의 눈에는 경이롭고 신비한 색상의 표현일 것이다. 무지개빛처럼 색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파스텔화는 그리는 이의 손끝에서 색과 색이 어우러져 투사체가 안개빛을 발한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붓으로 수채화를 그리면서 색과 색의 어우러짐, 하얀 스케치북에 흐르다 멈추다를 반복하는 빛의 향연을 보며 감동했던 적이 있다. 미술선생님과의 악연으로 그림을 멀리 하게 되다 보니 그림에 문외한이 되었고, 아직까지 유화를 그려본 경험이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 젊은 나이에 요절한 손상기 화백과 한 집 건너 살았던 덕에 그의 화실에 자주 들리며 그와 친하게 지냈던 까닭에 유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때의 기억에 의하면 유화는 덧칠이 가능한 그림이다. 그려놓고서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워낼 수도 있고, 덧칠할 수도 있다. 요즘에야 우리나라에도 유화를 그리는 화가가 아주 많아졌지만, 어린 시절에만 해도 그렇게 많지 않아, 유화하면 서양화라고 인식되었었다. 이십여 년 전 유럽여행길에 모나리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화를 원 없이 보았던 기억이 새롭다. 수십만 점이나 되는 유화를 소장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루브르박물관이나 베르사이유궁전의 유화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감탄을 하다가 나중에는 질려버린 기억이 새삼스럽다.


유화에는 우리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여백이 없다. 붓이 몇 번 스치고 지나가면 무릉도원이 나타나기도 하고, 선비의 해학과 서민들의 애환이 그려지는 수묵화와 달리 유화는 어느 한 곳도 발가벗기우려 하지 않는다. 화면 전체를 유화물감으로 도색해야 한다. 유화를 그리는 사람은 색의 선명도가 떨어지는 단점이야 있겠지만, 이처럼 언제든지 자신의 과거를 지워버릴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더 강한 색의 유화물감으로 서서히 덧칠해 버리면 종전의 그림은 사라지고 새로운 그림이 그 자리에 나타나게 된다. 유화화가들이 들으면 화를 낼지 몰라도 유화는 수채화나 수묵화에 비해 진실성이 떨어진다. 거짓이 가능하다.


음악은, 말은, 소리는 한 번 입 밖으로 나오게 되면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렇지만 쉽게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녹음되지 않는 한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고 오리발을 내밀 수가 있다. 들은 사람이야 환장할 일이지만 말한 사람이 말하지 않았다는데,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는데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소리는 이처럼 오류를 시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지만, 또 보관되지 않기 때문에 오리발을 내밀 수도 있다. 그러기에 말은 말대로 거짓말이 가능하다. 까닭에 똑같은 말을 열 명에게 들려주고, 그들에게 어떤 말을 들었느냐고 써내라고 하면 각기 그 내용이 다르다. 티브이 오락프로그램에도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다. 다섯 사람만 건너가면 완전히 다른 뜻의 문장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을 보면서 시청자들은 폭소를 자아내지만 한편으로 인간의 말하고 듣기가 얼마나 부정확한가를 새삼스레 깨닫고 놀랄 때가 많다. 기록을 남기는 사람은 그래서 무섭다. 아니 말만 하는 사람보다 더 진실되다. 비록 그 기록이 제 목에 칼이 되어 멸문의 화를 가져올지라도 기록을 남기는 사람은 자신에게 성실하고 역사에 충실한 사람이다.


유독 미술계가 시끄럽다. 물론 다른 쪽, 음악계나 문학계가 덜 밝혀져서 그렇지 크게 다를 바 없겠지만, 한국미술대전을 둘러싼 심사위원들의 금품수수 사실이 밝혀지고, 돈으로 미술상을 사는 후안무치한 일이 만천하에 드러나 수치스러웠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다시 동국대 신정아 교수 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고졸 학력이 외국 유수의 대학원 박사 학력으로 위조되고 박사 논문이 위조되었다는 것이다. 서른다섯 살의 젊은 여자에게 휘둘려 교수로 채용한 동국대나 공동위원장직을 맡긴 광주비엔날레행사주체나 수치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열 명의 파수꾼이 한 명의 도둑을 막을 수는 없다고 하지만, 이번 사건은 해도 너무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력보다는 학력이 우선시되는 세상, 언제나 유화물감으로 덧칠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모두들 위선과 가식으로 자신의 얼굴을 덧칠한다. 멀쩡한 사람이 성형수술을 하여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가식이 판치는 세상(성형이 왜 나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성형미인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내 느낌은 아, 저 사람은 성형을 했구나, 또 무엇을 바꾸었을까 하는 궁금증만 생길 뿐이다)이니 그림 한 폭 바꾸는 것을 탓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지만, 유화의 속성이 덧칠이 가능해서일까? 유독 미술계의 추접스러운 야합이 돋보이는 것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절대권력의 힘은 무섭다. 하기사 노숙자 사회에서도 왕초가 있고, 길거리 노점상이나 포장마차에도 우선권이 주어져 있음을 알기에 절대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 절대권력에 가까이 다가서려고 하는 미물들의 발버둥은 처절하다. 뭉친 두 사람은 흩어져 있는 백 명에게 이길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 불의와 부정의 늪을 강고케 하고, 절대권력의 절대성을 비호한다. 약한 자여, 세 사람만 뭉쳐보라, 너도 절대권력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어쩌랴? 세상은 점차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으니 덧칠에 덧칠을 더 하더라도 과학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골수를 쪼개고 내장을 파헤친다. 초음파로 태아의 모습을 엿볼 수 있고, 야간투시경으로 십리를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두 눈에 투시경을 달고 사는 세상이 되었으니, 더 이상의 덧칠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제 좀 솔직해지자. 거짓말 좀 그만 하고, 내 것 아닌 것에 욕심 좀 덜 내고, 오르지 못할 나무는 그냥 그 그늘 아래에서 쉴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살면 안 되겠는가? 신조차도 하지 못하는 영혼의 투시를 과학문명이, 기록된 어제가 하고 있음을 본다. 수많은 정치가들이 스스로 우매한 국민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야단들이지만, 어쩌랴, 우매한 국민이 영리한 정치가들의 머리끝에서 놀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덧칠이 가능하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 짝퉁으로 명품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 성형미인이 자연얼굴보다 더 아름답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 대한민국은...... 아, 거짓천지로구나. 그렇다면 결국 세상은 거짓이 진실이고, 거짓이 현실이고, 거짓이 정의인가? 아마도 그런 모양이다. 거짓 만세!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