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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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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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6.08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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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누름쇠, 벌레만도 못한 놈

 

6월이다. 현충일이 지났다. 그 날 아침 일찍 서둘러 조기를 달았다. 조기를 단 집들이 그리 많지 않다. 이틀 후면 6ㆍ10 항쟁일이다. 5공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발화점이었다, 그날은. 벌써 20년 전이다. 많은 이들이 죽어나갔다.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고, 목숨을 빼앗겼다. 그러나 오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날이 분수령이었다. 천지개벽이라고 할 정도로 세상이 바뀌어버렸다. 모두가 자유인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역사가 거꾸로 흐르려는 듯 그날로 시계바늘이 반대방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사람들이 다시 전면으로 나서고 있다. 사람들은 아주 나쁜 사람을 가리켜 개만도 못한 놈이라거나 벌레만도 못한 놈이라고 지칭한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개가 얼마나 충직한 동물인지, 벌레가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 생명체인지를 생각하면 미안해진다. 개야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니 말할 필요도 없지만 개만큼 우리 인간에게 많은 것을 주는 동물도 없다. 인간이 가장 가슴에 많이 품는 동물이 개이지 않은가? 요즘 같이 애완견이 임금 대접을 받는 세상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니 어찌 보면 개만도 못한 놈이라는 것은 이제 욕도 아니다. 애완견을 가슴에 안고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보면 개가 상전이요, 개가 부모보다 낫고 친구보다 나으니 다른 사람이 개만도 못한 놈인 거야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벌레들의 수명은 길지 않다. 사슴벌레의 수명은 약 2년 남짓 되어 제법 길게 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벌레들은 수명이 길어야 일주일에서 보름 정도에 불과하다. 청띠신선나비는 250일 가까이 살지만 대부분의 나비는 일주일 정도 산다. 그렇지만 그들의 애벌레 기간은 길고도 길다. 17년매미는 17년이라는 애벌레 기간을 거쳐 매미가 된다. 그리고서는 불과 2주 정도 살다 죽는다. 하루살이는 불과 몇 시간에서 며칠을 살기 위해 2년 이상을 애벌레로 산다. 벌레의 삶은 이렇게 치열하다. 벌레로 태어나는 것조차 신은 그렇게 오랜 시간 기다리라고 한다. 불과 10개월의 수태기간을 거쳐 태어난 인간이 100수를 위해 발버둥 치며 더 많은 세월을 땅속에서 참고 견뎌온 벌레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모습을 신이 본다면 웃을 일이다. 그렇게 오랜 인고의 세월을 이겨내고 성충으로 태어난 벌레들을 향하여 인간은 징그럽다며 설레발을 친다. 땅속에 숨어 있던 지렁이들은 비오는 날 땅위로 기어 나온다. 비오는 날이면 도시 한복판 어디에서든 보이는 지렁이들, 맑은 날 어디에 숨어 살까 싶지만 그들은 그냥 그렇게 벌레로 산다. 온몸으로 땅바닥을 기고 또 기며 산다.


지렁이를 보고 놀라 고함을 지르며 주저앉는 신애가 사는 밀양에 다시 빠져든다. 이청준의 벌레이야기에 빠져든다. 어린 아들이 유괴당해 죽임을 당한 그 고통의 시간에도 한갓 미물에 불과한 지렁이를 보고 징그럽다며 자지러지는 게 인간이다. 그렇게 자지러지는 스스로가 역겨워 다시 더 크게 소리 내어 우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언제나 그렇게 산다. 살아 숨 쉬는 인간은 제 눈에 박힌 티끌 하나가 너무 아파 견딜 수 없다. 손끝에 박힌 가시 하나가 모든 삶의 무게가 되어 버린다. 그게 인간인 우리는 또 그렇게 산다. 무지막지한 고통 속에서도 살겠다며 꾸역꾸역 밥을 삼키는 게 인간이고, 벌레를 밟아 죽이면서도 희희덕덕거리는 게 우리 인간이다. 제 스스로 약해져 신을 찾다가 제 스스로 강해져 신을 외면하는 게 우리네 인간이다. 결론은 그냥 제 혼자 사는 게 인간이다. 인간에게 신은 있다가 없다가 하는 그런 편리한 존재이다.


6월 그 어느 날 모두가 하나가 되어 광장,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을 때 광장에는 사람으로 넘쳐났다. 그곳이 강이었고, 그곳이 바다였다. 함성이 꽃으로 피었고 정의가 열매로 맺혔다. 그 열매들을 따먹으며 레드컴플렉스를 벗어던졌고, 권위의 사슬을 끊어버렸다. 모두가 자유인이 되었고 모두가 방랑자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 정의가 지렁이처럼 숨으려고 한다. 머리카락을 감추려 한다. 신애가 밀양의 햇살 속에서 스스로 잘랐던 머리카락처럼 바람에 날려 사라지려 한다. 정의가 쏟아놓은 햇볕, Secret Sunshine에 젖어 곳곳에 꽃들이 피었는데, 정작 세상은 여전히 그림자가 넘쳐나고 있다. 그렇지만 되돌아보면 그림자가 넘쳐나는 것,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림자가 없이 햇빛만 넘쳐난다면 지렁이가 어떻게 세상 구경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햇살 아래 기어가는 지렁이는 없다. 지렁이의 허리를 잘라 본 사람은 안다. 지렁이는 허리가 반이 잘려 나가도 기는 동작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몸마디 하나라도 살아 있으면 기어간다. 지금도 허리가 잘린 사람이 기어가고, 팔다리가 잘린 사람이 기어가고, 또 기어가고 있다. 풍요 속에 상처 입은 영혼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모두가 밀양의 신애이고, 사랑도 거짓말, 미움도 거짓말이라고 외쳐대는 김추자이다. 열심히 기도하는 성직자와 하늘을 치켜보며 내가 너에게 질 줄 알고 중얼거리는 신애의 뒤편으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소리가 크로즈업된다. 그래도 신애는 신의 편이다. 제 팔목을 제 손으로 자르고 철철 피가 흐르는 팔목을 부여잡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절규하는 신애는 신의 편이다. 왜냐고? 신만이 생명이고, 신만이 구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아니하는 신은 어디에도 존재하는 인간을 감싸는 숨어있는 햇볕, 밀양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죽을 때,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위선의 탈을 벗을 수 있다. 살아있는 매순간은 위선으로 점철된 거짓일 수밖에 없다.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마다 우리말로 좋은 뜻이 없을까 수없이 고민하다 최근에 “누름쇠”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드시 한 번씩은 눌림을 당하는 그 버튼의 우리 이름이 없다는 것이 못내 나를 괴롭혔는데, 나는 그 버튼에 우리말 누름쇠를 선물하기로 했다. 제 이름을 갖지 못한 채 누름쇠는 어제도 오늘도 눌림을 당하고 또 당하며 버티어왔다. 모두에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힘듦을 면제해주는 구원자이면서도 제 이름을 갖지 못한 엘리베이터의 누름쇠에게 밀양의 햇볕이 따사롭게 내리쪼이기를 바란다.


아직도 벌레만도 못한 놈이라는 말을 들어도 될 만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나는 벌레들에게 한 마디 하여야겠다. 미안하다, 미안하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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