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가야 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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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가야 할 길"
  • 장영민
  • 승인 2007.06.01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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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민 이화여대 법대교수

 

미국의 사법사상 두 탁월한 법률가였던 올리버 웬들 홈즈(연방대법관)와 러니드 핸드(연방법원 판사) 사이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핸드가 홈즈의 서기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홈즈가 출근하는 길에 핸드를 마차에 태우고 가다가 중간에서 내려 준 일이 있었다. 이때 핸드는 홈즈에게 이렇게 인사하였다. Do justice, Justice(연방대법관님, 정의를 잘 세우세요)라고. 그러자 홈즈는 벌써 저만큼 간 마차를 굳이 되돌려 와서 대답하였다. That's not my job(그것은 내 일이 아니야)라고. (러니드 핸드 판사는, 최고의 연방대법관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그 사람은 연방대법원 밖에 있다"는 찬사를 받은 주인공이었던 분이다.)


이 대답의 의미는 홈즈가 쓴 '법의 진로'라는 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법이 가야 할 길' 또는 '법학 내지 법률가가 가야  할 길'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이 글은 홈즈의 생각을 요약하여 담고 있다. 홈즈 역시 케이스 메소드의 창안자인 랭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적 실증주의의 시대에 살았다. 따라서 그도 법이 과학이기를 염원한 사람이었고, 이때 그가 염두에 둔 과학성이란 랭들과 같은 논리적 체계성이 아니라, 과학이 줄 수 있는 장래에 대한 예측가능성이었다. 법이란 당해 사안에 대하여 법원이 판결할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 보는 이른바 법예언설은 바로 이것의 표현이다. 그의 글에서 예언은 점치는 행위로 비유되어 서술되고 있지만("점괘를 적어 놓은 산(算)가지가 뽑혀지면 그에 따라 (국가 공권력이라는) 철퇴가 내려진다"), 이는 그의 냉소적 수사(修辭)에 지나지 않고 그의 진의는 법의 과학성의 확립이었다.


그는 법이란 어떤 신비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예측가능한 사회생활을 가능케 하는 사회제도이고, 법률가란, 특히 변호사란 공권력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예측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장래를 예측해 주는 사람으로서, 이 때문에 법이란 하나의 직업이 될 수 있고 나아가 하나의 사업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예측작업에서 법과 도덕의 혼동을 피하는 것이 선결문제임을 지적한다. 도덕의 언어로 구성되어 있는 불법행위법 등 많은 법영역에서 이를 정리하는 것이야 말로 법의 진정한 모습을 그리는 길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법률가가 논리체계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경제학·사회학 등의 사회과학적 소양을 쌓을 것을 역설한다. 이를 통해서 그는 사회적 이익의 요구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법률가상을 권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구상이, 예언을 하기 위하여 단순히 기존의 판례를 답습하는 법률가상이 아니라, 사회적 이익(공익)의 향배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자신의 판결에서 공익을 실현하는 법률가상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그의 이 말은 (연방대)법관의 사명이 사회적 이익의 조정임을, 그럼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공익을 세우는 것임을 규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실주의적, 실용주의적인 법률가가 그 글에서 법과대학에서 더욱 필요한 것은 실무교육이 아니라 이론 교육임을 강조한 점("교수방법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건축에서 설계사가 중요한 것처럼, 법학에서는 이론이 가장 중요하다")은 주목할 만하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로스쿨 논의가 진행되고 있고, 그 가운데 실무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홈즈의 이 말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그는 말한다 : 이론(의 발전)이 실천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이론이란 탐구대상의 근저에까지 고찰해 내려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홈즈의 말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실무교육 논의가 몇가지 오해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로스쿨을 졸업하는 순간(법조인의 자격을 획득하는 순간) 완성된 한 사람의 훌륭한 법률가가 탄생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일반 회사에서도 신입사원에게 독자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가기 전 상당 기간의 훈련기간을 거치게 한다. 둘째, 법률가는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판례를 만들 수 있는 능력자로 양성되어야 한다. 판례를 단순히 답습만 하는 법률가는 홈즈 자신의 이력('위대한 반대의견 제출자')에 비추어 보아도, 그리고 그의 소수의견이 옳았음을 보여 준 그 후의 역사의 전개에 비추어 보아도 바람직한 법률가상이 아니다.


외국의 제도를 도입할 때 그 물적·사회적 기반과 정신적 지향점을 도외시하고 눈에 보이는 틀만을 도입함으로써 야기되는 폐해는 매우 클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꼭 한 세기하고도 10년 전인 1897년에 쓰인 이 글이 이 시점에서 다시 반추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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