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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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
  • 이상연
  • 승인 2007.05.18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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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숙 부산지법 판사

 

몇일 전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DVD를 빌려보았다.


영화도 나름 감동스러웠으나 책이 주는 그것에는 비할 바가 못되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가슴 깊은 곳으로 스며들던 먹먹함...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느꼈던 가슴 한켠의 서늘함이 또다시 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이 소설의 내용은 사형수에 관한 이야기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 어머니는 도망가고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농약먹고 자살하였다. 어린 시절 열병을 앓은 뒤 눈이 먼 동생과 노숙을 하다 눈먼 동생은 길에서 죽고 홀가분하게 나쁜 녀석으로 살아갔다. 그러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손 씻고 잘 살아볼려는데 여자가 아파 돈이 필요하였고 마지막으로 한번만...하고 금은방을 털기로 하였다. 그러나 일이 잘못되어 여자아이를 강간하여 죽이고 사람 둘을 더 죽여(실은 공범이 한 것을 자기가 한 것이라고 자백해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와 가정, 학벌, 무엇하나 부러울 것 없이 잘 나가지만 실상은 15살에 사촌오빠에게 강간당한 뒤 엄마에 의해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그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살아야 했던, 세 번의 자살미수 전력이 있는 여교수가 우연히 만나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가는 사랑이야기이다.


어찌보면 참 뻔한 스토리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였다.

 

.......눈 먼 동생과 앵벌이를 하면서 버는 돈을 모두 마흔이 넘은 깜상이라는 작자에게 주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생의 생일날, 동생이 먹고 싶다는 컵라면 한 상자를 훔쳐 달아났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 근처에 서 있던 동생이 가게 주인에게 붙잡혔습니다.


저 한몸이라면 그대로 달아나버리겠지만 형아 형아 부르며 울고 있는 동생 은수 때문에 저는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돌아가 그 상자를 가게 주인에게 돌려주며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저씨는 컵라면 상자가 없어진 게 열 상자 째라며 저와 은수를 파출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너희 같은 놈들은 단단히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린다고,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아무리 이번이 처음이라고 해도, 우리들은 컵라면 열 상자를 훔친 도둑으로 소년원으로 보내졌습니다. 눈 먼 동생 은수는 공범이었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윤수의 모습 속에서 내 어린 시절 한 사건이 오버랩 되어졌다.


초등학교 6학년 겨울이었던 거 같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슈퍼에 들어갔다. 엄마가 아침에 주신 500원을 가지고 과자를 사먹으려고 했는데 먹고 싶은 것은 너무 많고 돈은 턱없이 부족했다.


주위를 살펴보니 슈퍼마켓 아줌마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신주머니 안에 내가 먹고 싶은 것들을 이것저것 골라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에는 500원짜리 과자 하나를 들고 아줌마에게 돈을 내고 나오려는데 아줌마가 나를 붙잡아 내 신주머니를 빼앗아갔다. 그리고 그곳에 든 과자들을 하나씩 하나씩 끄집어 냈다.


슈퍼 천정에 커다란 거울이 달려 있어서 내 모습이 거울을 통하여 다 보였던게다. 조그만 신주머니 속에서 과자들이 줄줄이 나왔다.


그때의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어린 마음에도 죽고 싶을 정도로 너무 부끄럽고 또 무서웠다. 그 아줌마는 나의 머리를 세게 한 대 때리고는 나를 노려보았다.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났다. 나를 노려보던 그 눈길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엄마에게 말하면 어쩌나, 경찰 아저씨한테 잡혀가는 것인가...


한참을 엉엉 울었더니 아주머니께서 “착하고 똑똑하게 생긴 애가 와 그랬노?” 하고 물어보았다. 나는 울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너무 먹고 싶어서요...”


아줌마의 그 무섭던 눈길은 어느새 부드러운 눈길로 바뀌어 있었다.


“니처럼 먹고 싶다고 아무런 말없이 그렇게 그냥 가져가버리면 이 아줌마같이 장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 살겠노? 그자? 착하게 생겼는데 실수한 거제? 남의 거 가져가면 안된다. 알겠제? 앞으로는 안 그럴거제?” 그러면서 내게 그 과자들을 다 주셨다.


그 많은 과자들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후에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아니 손을 대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듯 싶다.


만약 그때 그렇게 현명하고 좋은 아줌마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래서 경찰에 신고를 하였다면...저 윤수를 파출소로 데려갔던 아저씨같은 그런 사람을 만났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윤수처럼 사형수까지는 아니었더라도 판사가 되어 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DVD를 본 뒤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어 보다가 제일 마지막 장에 적힌 일기형식의 독후감을 발견하였다.


2006. 2. 28.


오랜만이었다. 이렇듯 한 권의 책을 정신없이 읽어내린 것이...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이 사건의 판사라면...


내 앞에 윤수란 자가 있다. 자기가 17세의 여자아이를 강간하고 죽였으며 두명의 여자를 죽였다고 자백한다. 그는 도망가다 어느 주택가를 들어가 칼을 들고 인질극을 벌이다가 결국 다리에 총을 맞고 잡혔다. 그의 공범은 자기도 그가 사람을 셋이나 죽이는 걸 보고 자신은 그저 돈을 훔쳐 나왔다고 진술한다.


기록 속에는 죽은 자들의 참혹한 광경이 사진 속에 묶여 나를 괴롭힌다.


윤수, 그는 별로 반성하는 기미도 보이지 않고 이 세상 살기 싫다는 그런 표정이다. 부자놈들  더 못 죽이고 들어온 것이 한이라고 귀찮은 듯 내뱉는다.


사형...


하나님 외에 누구도 인간의 생명을 단절시킬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데 판사인 나는 어떤 근거로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줄 수 있을 것인가...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사형이란 극약 처방을 받지 않았더라도 그렇게 변화되어 졌을까.


그들을 무기징역에 처하고 평생 교도소에 살라고 했다면 이 책 어디선가 나오는 윤수처럼, 마음이 푸근해지겠지. 잠잘 곳, 먹을 것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면서 교화는 커녕 새로운 재소자들에게 범죄의 기술을 전수하면서 그곳에서 존경과 추앙을 받으며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까...


그러나 사형 집행 직전의 천사같이 변해버린 그들을, 한때 지은 짐승보다 못한 범죄를 들먹이며, 목에 동아줄을 걸어야 한다는 것은 가슴터지게 아이러니한 사실이기도 하다.


아...어떻게 하여야 하나


이 사회의 가난을...부모의 애정과 보살핌을 전혀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아이들...


그리고 범죄자들에 희생되는 사람들...남겨진 가족들...

 

.........이곳 구치소에 들어와서 저는 처음으로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보았습니다. 인간이라는 게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았고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어떻게 서로를 존중하고, 존댓말을 쓰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살인자로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제 육체적 생명은 더 연장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제 영혼은 언제까지나 구더기 들끓는 시궁창을 헤메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차마 구더기인 줄 모르고 그것이 차마 시궁창이었는지 모르고...저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행복한 시간이라는 것을 가져보았습니다. 기다는 것, 만남을 설레며 준비하는 것, 인간과 인간이 진짜 대화를 나눈다는 것,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 서로 가식없이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사랑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고, 용서받아본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는 걸...알았습니다...........

 

유치환님의 시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의 마지막 연이,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간으로서의 기쁨과 행복, 사랑을 느끼며 살았던 소설 속 윤수의 마음을 잘 담아낸 듯 싶어 이를 인용하며 글을 마치려고 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법률저널 창간 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9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수많은 고시생들에게 유익한 정보와 유용한 읽을거리를 제공한 법률저널의 수고와 노력들이 있었기에 오늘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러한 법률저널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수혜자 중의 한 사람이었구요.


앞으로도 더 좋은 기사들로 수험생들에게 유익한 동반자가 되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는 법원 내 월간지인 ‘법원사람들’ 5월호에 실린 글인데, 법률저널 창간 9주년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또 힘들고 지친 수험생 여러분들 잠깐 쉬어가시라는 의미에서 함께 기고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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