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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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7.05.18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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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교수/변호사/시인

 

흔적의 힘은 강하다

 

흔적을 남기는 사람은 흔적을 무시하기 쉽다. 뒤에 남겨지기 때문이다. 뒤에는 눈이 달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적의 힘은 무섭다. 뒤에 남겨지기 때문이다. 뒤에서 그 흔적을 밟고 걷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남이 남긴 흔적을 내가 밟고, 내가 남긴 흔적을 남이 밟는다. 흔적은 밟히면 밟힐수록 스러지는 것이 아니라 선명해진다. 흔적의 특성은 남겨지는 것이고 밟히는 것이기에 밟힘의 횟수가 많을수록 더 뚜렷해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흔적 남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흔적을 남긴 자는 흔적을 쉬이 잊지만 남겨진 흔적은 자기를 남긴 자를 쉽게 잊지 못한다. 그게 흔적의 생리이다.


국내 최고 권위를 부여받고 있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이 검은 돈으로 얼룩져 있음이 수사기관에 의해 밝혀졌다.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특선은 1,000만원씩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뇌물이 건네진 작품은 미리 사진을 찍어 심사위원들이 돌려가며 암기토록 하였다가 점수를 매겼다니 가관도 이런 가관이 있을 수 없다. 1차 심사에서 탈락한 작품조차 심사워원장을 찾아가 이사장의 부탁이니 특선을 시키라는 한 마디에 특선작으로 뽑혔다니 할 말을 잃는다.


칼자루의 명은 질기다. 칼날 위에 선 자는 바람 앞의 촛불이라 끊임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칼자루를 쥔 자의 명줄은 모질고 모질다. 칼자루를 쥔 자는 이 사회 곳곳에 숨어있다. 명색이 시인이라 문학상 시상식 자리에 종종 가본다. 아주 간혹 상을 탈 만한 분이 상을 탔다고 함께 기뻐할 때도 있지만, 왜 저 사람이 상을 타야 하는지 알다가 모를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심사위원장의 심사강평에 보면 이런 글귀가 숨어 있다. 작품만으로 상을 뽑은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그 말이 심사위원들이 놓고 쓰는 겸양의 말인 줄로만 알았더니 알고 보니 다 구린내가 있다는 무의식적인 발로가 아니었는가 싶다. 아니 문학상을 작품의 우수 여부로 뽑아야지 그 외에 인간적인, 실은 친소관계나 혹시나 후원금이라는 명목의 돈을 받고 뽑는단 말인가? 기가 막히다 못해 졸도할 일이다.


칼자루를 쥔 자들은 서로를 향해 진검승부를 펼치지 않는다. 다칠 뿐이기 때문이다. 칼자루를 쥔 자들은 서로의 영역 안에 안주한다. 외출을 두려워한다. 완전 따로 국밥이다. 자기 영역에 외부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한다. 까닭에 자기도 남의 영역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 작은 왕국, 그들만이 살고 있는 작은 왕국에서 그들은 군주고 황제다. 요즈음 내가 알고 있는 많은 문학잡지들이 경영난으로 휘청거리고 있다. 옛날부터 문학잡지를 운영하는 잡지사들이 가난의 때를 벗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자본주의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누가 돈을 내고 문학잡지를 사 보겠는가? 그것도 흥미 위주의 글이 아닌 시 잡지를. 그러니 그러한 시 잡지사를 운영하기 위해 여기저기 후원금을 기대해보지만, 기업들은 광고층이 형성되지 않는 시 잡지사에 대한 후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가난한 시인들끼리 제 살 깍아 먹는 깨끗하지 못한 일들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에게 상을 주고, 그 상이 빌미가 되어 다른 곳에서 또 그 상을 준 자에게 상을 주고, 서로 나눠먹기식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가격을 올리고, 이를 알지 못한 독자들은 그들이 위대한 시인인 것처럼 맹목적으로 따르고. 시와 시인이 다름을 알아야 한다. 아름다운 시로 사람의 심금을 올리는 그 시인이 얼마나 추잡한 짓을 많이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름다운 시를 쓰지 못하는 시인들 중에도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하지만 시인은 인간이기 전에 시를 잘 써야 하고, 화가는 인간이기 전에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 남는 것은 작품뿐이기 때문이다. 작품을 창작한 시인도 화가도 다 작품 앞에서는 들러리일 뿐이다. 그 칼자루들이 좋은 작품을 뽑아주면 다행이지만, 돈을 받고 엉터리 작품을 뽑아주면 이것이야말로 자신에 대한 배신이다. 어디 배신이 미술과 문학에서만 공공연히 자행되겠는가? 음악 쪽도 마찬가지이다. 그 몇몇의 칼자루를 쥔 자들이 자기 구미에 맞는 이들끼리 떼를 지어 자기들 왕국을 만들고 출연 여부를 결정짓는다. 각종 오페라, 음악 콘서트에 그들만의 잔치를 벌리고 관객은 들러리가 되고 만다. 진짜 노래 잘하는 성악가는 무대에 설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역사는 그냥 흐른다.


어디 그뿐인가? 방송에 출연하는 자들, 그들 역시 몇 개의 힘 있는 연예기획사들에 소속되어 있고, 그들이 다른 신인들의 진출을 억제하면서, 그들의 왕국에 속한 자들에게만 기회를 주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서 제 목에 칼이 되어 돌아올 흔적들을 남기고 있다. 그 왕국이 무너지지 않을 천년제국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왕국 안에서 별의 별 추잡한 짓을 다 해도 통해왔기에, 흔적을 남기는 데 겁을 내지 않는다. 그러나 흔적이 제 스스로 자생의 힘을 갖고 있음을 왜 잊고 있는지 알다가 모를 일이다. 흔적의 힘은 그냥 존재만으로 그 자를 파멸시킨다. 흔적을 남긴 자를 괴멸시키고, 스스로 선 곳에 무덤을 파게 만든다.


가장 힘센 칼자루는 뭐니 뭐니 해도 정치가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 권력을 사유물인 양 행사하고, 공천권을 비롯한 각종 인ㆍ허가권을 행사하여 많은 이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칼자루의 힘이 크면 클수록 흔적도 크고, 그러기에 나중에 흔적의 배신 또한 크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이명박 씨와 박근혜 씨가 대통령 후보 경선 룰에 합의하여 이제 경선이 치러질 모양이다. 서로는 서로의 흔적을 뒤집어 보이겠다고 야단이다. 후보검증을 철저히 하여 본선에서 승리토록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제 국민은 들춰질 흔적을 구경할 일만 남았다. 그 흔적에서 먼지가 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흔적의 힘은 참으로 강하다. 오늘, 우리는 어떠한 흔적을 남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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