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와의 합의는 피고인의 감형을 위한 중요한 양형인자다. 그렇기 때문에 피고인 또는 변호인은 피해자와의 합의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피고인의 입장에서 다행히 합의가 되면 좋지만 피해자가 응하지 않는다면 차선으로 공탁을 고려하게 된다. 이를 형사공탁이라 하는데, 피고인이 금전, 유가증권, 기타 물품을 법원의 공탁소에 임치하여 언제든 피해자가 원하면 해당 금전 등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피해회복이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피해자와의 합의 정도는 아니지만 형사공탁은 양형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공탁법이 개정되기 이전에는 형사공탁을 위해 피해자의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등의 인적사항을 알아야 했다. 그런데, 형사사건은 민사와 달리 피공탁자가 범죄피해자라는 특성상 피공탁자의 인적사항을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선처를 바라는 피고인으로서는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알아내려 했고, 피해자를 찾아가 합의를 종용하고 협박하는 등 2차 피해가 발생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탁법을 개정하여 형사공탁특례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 2022년 12월에 시행된 형사공탁특례에 따르면 공탁서에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기재하지 않더라도 공소장 등에 기재된 피해자를 특정할 수 있는 명칭이나 사건번호 등을 기재하는 방법으로 공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특례가 시행됨으로써 피해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고 피해회복을 위하는 동시에 피고인이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모르더라도 공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피고인 입장에서는 합의가 여의치 않을 때 형사공탁특례제도를 이용해서 공탁을 함으로써 감형을 받기 쉬워졌고, 변호인으로서도 보다 수월하게 피고인에게 유리한 양형자료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인적사항이 노출되는 위험은 줄었지만, 가해자로부터 진지한 사과나 합의의 노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고, 피해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손쉬운 공탁을 통해 감형을 받게 되는 불합리한 점 또한 발생하게 되었다.
특히, 공탁법은 형사공탁의 특례를 규정하면서 공탁 통지는 공탁관이 인터넷 홈페이지 등에 공탁 사실을 공고하는 방법으로 갈음할 수 있도록 하고 있어 정작 해당 사건의 피해자도 모르게 공탁이 이루어지는 일이 생겼다. 나아가, 공탁기간에 제한이 없다 보니 피해자가 형사공탁에 대한 이의 의견을 낼 수 없도록 변론 종결 이후 공탁을 하는 이른바 기습공탁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하여 피공탁자인 피해자가 법원으로부터 형사공탁 사실을 직접 통지받을 수 있도록 하거나, 형사공탁을 해당 형사사건의 변론종결기일 14일 전까지 할 수 있도록 제한하는 공탁법 개정안이 국회에 계류 중에 있다. 해당 개정안에 따르면 공탁 사실을 피해자가 알지 못하거나, 공탁에 대한 피해자의 의견 진술 기회가 사실상 봉쇄되는 문제점은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위 공탁법 개정안은 이번 총선으로 새로운 국회가 구성되기 전까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면 자동 폐기될 운명에 처해 있다. 다행히 법원이 지난 1월 형사공탁사실 통지 절차를 개선하여 공탁소에서 검찰에 우편으로만 통지서를 발송하던 것을 우편 발송 전에 팩스(fax)를 통하여 먼저 송부하도록 함으로써 검찰이 신속히 피해자의 의사를 확인하여 재판부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원래 형사공탁은 가해자가 피해자와 진지한 합의의 노력을 하였음에도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을 경우 차선책으로 공탁을 하도록 함으로써 어느 정도 피해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양형에 반영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러나, 피해자의 사생활 침해 등 2차 피해를 막기 위해 마련된 형사공탁특례를 악용하여 피고인은 피해자와 합의하려는 노력 조차 하지 않고 손쉽게 공탁을 하고, 법원은 피해자의 의사도 확인하지 않고 감형을 해주는 문제점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공탁법 개정이나 공탁사실통지 절차 개선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점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만, 무엇보다 철저한 양형조사를 통해 피해자 측의 합의 의사 여부를 확인하고, 피고인의 합의를 위한 노력 여부나, 공탁 경위 등을 확인하여 이를 양형에 반영하는 법원의 적극적인 자세 또한 필요해 보인다.
신종범 변호사/법무법인 태일
http://blog.naver.com/sjb629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