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업 변호사의 법과 정치(351)-백목련을 닮은 여인, 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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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업 변호사의 법과 정치(351)-백목련을 닮은 여인, 육영수
  • 강신업
  • 승인 2024.03.08 10:45
  •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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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업 변호사, 정치평론가
강신업 변호사, 정치평론가

대한민국의 제5~9대 대통령 박정희의 배우자,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 29일 충청북도 옥천에서 대지주 육종관과 본처 이경령 사이의 1남 3녀 중 셋째이자 차녀로 태어났다. 위로 언니, 오빠 아래로 여동생이 있다.

육영수 여사의 아버지 육종관은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알아주던 지역유지이자 전형적인 대지주였다. 육종관은 농업 외에도 미곡도매상, 금광, 인삼가공업을 해서 막대한 부를 모았기 때문에 대지가 3천평 99칸의 대저택에서 살았고 여사가 태어나던 1920년대에 이미 전화기와 자동차까지 있었다. 육종관의 저택을 구경한 시인 박목월은 조선 상류계급의 건축을 대표하는 비원의 ‘연경당’과 맞먹는 건물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는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배화고등여학교로 진학했다. 배화여고 졸업 후 여사는 대학에 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 육종관이 “여자애들이 공부하면 건방져진다”면서 대학 진학을 반대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육영수 여사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며칠을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1942년 3월, 배화여고 졸업 후 육영수 여사는 고향 충청북도 옥천군으로 내려가 아버지 일을 돕다가 1945년 10월부터는 옥천여자전수학교에서 1년 3개월간 교사 생활을 했다. 교사 생활 중 남자 교사가 성희롱성 발언을 하자 그 길로 바로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발언의 당사자는 물론 교장까지 집으로 찾아와 사과를 했지만 육영수 여사는 끝내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육영수의 강직함과 뚝심을 동시에 잘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육영수 여사는 1950년 8월 이종사촌인 송재천의 소개로 부산에서 소령 박정희를 만났다. 정식 맞선은 아니고 잠시 짬을 내서 만난 것이었는데 박정희는 나중에 ‘목이 길고 고상하게 생긴 처녀’에게 단박에 호감을 느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고 한다. 만난 지 불과 3개월 만인 1950년 12월 12일, 두 사람은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나이는 박정희가 33세, 육영수가 25세였다. 아버지 육종관은 딸의 결혼을 반대했고 자기 자신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서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도 박정희를 사위로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박정희가 집권한 뒤에도 청와대를 한 번도 찾지 않다가 임종할 때야 비로소 내가 큰 인물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사과를 했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의 정치적 내조자였다. 여사는 청와대 안의 야당 역할을 했다. 항상 한복 차림에 소박하고 따뜻한 모습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청와대로 들어오는 민원이나 진정을 소리 나지 않게 처리했다. 또 위험해 보이는 일부 고위직 인사를 견제하는 등 눈에 안 보이게 권력의 중재자 내지 조정자 역할도 했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 대한제국 최후의 황태자 영친왕의 처인 이방자 여사와 함께 고아원과 보육원 등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한센병 환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다과회를 열고 구호물자를 보내는 등 한센인들의 인권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73년 육영수 여사는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 듣고,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뜻을 받들어 노동교실을 설립하자, 이를 적극 챙겨 지원하는 등 노동자들의 권익에도 신경썼다. 불우 청소년들의 직업 보도를 위해 정수직업훈련원을 설치하고 육영재단이나 어린이회관을 짓는 등 아동복지와 소외된 계층들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육영수 여사는 사랑받는 영부인이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가 향년 만 48세의 나이로 숨지자 200만에 달하는 조문객 인파가 몰렸다. 육영수 여사의 모교인 배화여자중학교·배화여자고등학교 교정에는 그녀를 기리기 위한 ‘육영수 여사 기념관’이 세워졌다. 2016년에는 육영수가 암살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백목련’이라는 이름의 추모 공연이 열렸다. 목련은 육영수가 생전에 좋아하던 꽃인데, 한복을 입고 올림머리를 한 그녀의 모습을 당시 사람들이 목련에 비유했다고 한다.

곧 백목련이 핀다. 때맞춰 4.10. 총선이 열린다. 총선을 앞두고 여기저기 나요, 나요 하며 손드는 자들 천지다. 그러나 나는 그 자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문득 육영수 여사가 떠오른다. 백목련이 피면 몇 송이 챙겨 현충원을 찾아야겠다!

강신업 변호사, 정치평론가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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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종란 2024-03-10 20:29:40
육영수 여사님은 진정 우리나라의 국모였습니다. 우리나라를 일으키게 하신 공로가 크신 여사님이셨습니3ㅏ!

노희선 2024-03-10 20:24:46
가입 첫출근 합니다

임봉희 2024-03-10 20:18:33
육영수여사님 그립습니다

김춘자 2024-03-10 17:15:19
육영수 여사님 그립습니다!!
4월19일 강변님과 함께 하는
육영수 여사님 생가방문 기다려 집니다~

조덕신 2024-03-10 14:06:42
고 육영수 여사 성장 과정을 못라던 내용을 설명에 감사 강신업 변호사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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