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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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 최용성
  • 승인 2024.02.2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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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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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인간은 줄을 그어 가축 수를 표시하거나,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는 식으로라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기록하여 왔다. 입으로 불확실하게 전해지던 지식과 지혜는, 마치 인공지능 시대에 정보가 대폭발하듯이, 문자가 발명되면서부터 대량으로 늘어나고 널리 전파되면서 더 정확히 후대에 계승될 수 있었다. 흔히 ‘4대 성인(聖人)’으로 추앙받는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는 인류의 삶과 생각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지만, 정작 그들의 생각을 직접 담은 저술은 남기지 않았다. 제자들이 집단적 기억을 모아(결집) 만든 불경, <논어>, 플라톤의 저술, 사도 개개인이 쓴 성경 등의 기록이 남지 않았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4대 성인’의 목록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이처럼 기록이 사상을, 역사를, 그리고 위인을 만든다.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

기록은 삶을 기억하고 인정받으려는 자아의 표현 수단이자, 과거와 현재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아 미래를 준비하는 생존전략을 위한 도구이다. 특히 후자는 한 사회가 존속하기 위한 공적인 기능을 가진다. 기록을 통하여 공동체는 역사를 기억하고 보존하여 후대에 전하며 정체성을 잃지 않고 존속한다. 우리 조상들은 이를 잘 알고 실천하였다. 아쉽게도 폭압적인 일제 식민지 시대, 그리고 검열과 탄압이 판치던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기록문화는 절맥(絶脈)이라고 할 만큼 상당히 퇴보하였다.

절맥된 공적 기록의 역사를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길은 무엇일까.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 교수 박찬운의 <기록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2023. 혜움터)는 그에 대한 지식인의 응답이다.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기록 자체에도 있지만, ‘기록하는 인간’(homo biblos)의 태도가 어떠하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저자는 2020년 초 국가인권위원회의 상임위원으로 처음 출근하는 날, “공직에 나가 있는 3년 동안 내가 경험하는 일들을 모두 기록할 것이다. 내 경험을 그저 개인의 기억 속에 두지 않을 것이다. 기록하고 또 기록해 내 경험을 역사로 만들 것이다. 그것이 고위 공직에 출사하는 사람의 태도”라는 힘든 결심을 한다. 마치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처럼.

한 개인이 공적 업무를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목적의식을 갖기도 어렵지만, 인간은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존재라서 중립적 관찰자를 표방하더라도 객관적인 기록을 남기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물며 기록하는 이가 참여자라면 자칫 자신을 미화하거나 타인을 비난하며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폭로로 흐를 위험이 크다. 여기서 저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줄이고 회고담이나 폭로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여 객관과 주관 사이의 균형을 달성한다. 그리하여 책은 “한 고위 공직자가 자신의 업무와 삶을 집요하게 기록으로 남겨 그것에 기초해 쓴 ‘일과 삶의 역사’”가 된다.

여러 사건 중 특히 10·29 이태원 참사와 겹칠 수밖에 없는 스텔라 데이지호 사건에서 저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2차 수색을 권고하여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낸다. 국가는 생명권뿐만 아니라 애도권과 신원권(伸冤權. “가족 중 누가 뜻밖의 죽음에 나머지 가족들이 그 진상을 밝혀내고 그 결과 억울한 일이 있었을 때는 법절차에 호소하여 그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할”(서울고등법원 89나50586 판결) 권리)을 보장하여야 한다는 것. 인권 사건 처리, 평등법 제정 권고, 군인권보호관 제도 신설, 노동자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노란봉투법 제정 의견 표명 등등 3년 동안 국가인권위원회가 한 일이 얼마나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또 다른 장점은, 실제 국가인권위원회 조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그 업무는 물론이고 국제교류 등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생생하게 알려준다는 점이다. 그 점에서 이 책은 실무가는 물론이고 이 분야에서 일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도 대단히 실용적인 책이다.

카이스트 졸업식의 “입틀막” 사건으로 대통령과 대통령경호처가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된 지금, 국가인권위원회의 사명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여야 할 것인지 이 책은 시의적절한 성찰의 지점을 제공할 것이다. 나는 기록한다, 고로 존재한다.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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