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49-운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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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49-운이 좋았다
  • 손호영
  • 승인 2023.12.1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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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운”. 의사이자 경제학자인 김현철 홍콩과학기술대학교 교수님이 인생의 성취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능력’도 중요한 것 아닌가? 라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태어난 나라에 따라 평생 소득의 50% 이상이 결정됩니다. 부모가 물려준 DNA가 30% 비율로 소득에 영향을 미쳐요. 집중하는 힘조차 유전과 양육 환경에서 나와요. 순수한 내 능력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무슨 말인가 들여다보면, 이내 납득하게 됩니다. 그는 ‘태어난 나라에 따라 평생 소득의 50% 이상이 결정되고, 부모가 물려준 DNA가 30%, 자라난 환경이 10%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 결론은 입양아와 친자의 소득 추적 통계에 따른 것입니다. 과연 내가 미국에서, 한국에서, 일본에서,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나의 삶은 꽤나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는 평생 소득을 결정짓는 나머지 10%는 ‘운’이라고 하며, 순수한 능력과 노력이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단언합니다.

능력과 노력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운’이 가장 중요하다는주장은 자칫 근면과 성실의 중요성을 낮게 볼 가능성이 있어, ‘해이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에 대해 다른 각도로 접근합니다. 그의 말을 영화 은교의 명대사 스타일로 변형해보면 이럴 것입니다. ‘나의 성취가 나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너의 가난은 너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좋은 결과는 운이 좋았던 것이고 나쁜 결과는 운이 나빴을 뿐이라는 명제는, 좋은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는 겸손을, 좋지 않은 결과를 얻은 사람에게는 위안을 준다는 것이겠지요. 그의 말은 어쩌면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사실은 무척 현실적인 생각입니다. 그의 명제는 고부담 고복지의 사회를 정당화하는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그저 고부담 고복지를 외치지는 않습니다. ‘과학’을 통해 정밀한 해법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는 ‘지금 해외 경제학자들은 통계와 사회실험으로 삶의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진’하고 있다면서, 현재 획기적으로 나아진 데이터 환경으로 정책 효과의 인과성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즉, 그는 ‘실증주의 경제학’을 도구로 삼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실증주의 경제학을 토대로 영유아기, 태아기, 임산부 등 정부가 미리 개입해 지원 효과를 확실히 얻자고 말합니다.

그는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계좌를 한번 등록하면, 국가가 먼저 사정을 살펴 선지원 하는 AI 시스템’을 주창하기도 합니다. 저소득층의 신청에 따른 복지 지원이 아닌, 국가가 먼저 나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국가가 국민의 계좌를 계속해서 들여다보는 것이 과연 정당한지는 조금 더 검토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제가 법률가이기 때문이겠지요?

언젠가 이수형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인터뷰에서 그가 ‘증거에 기반한 정책 결정(EBPM, Evidence-based Policy Making) 모델’을 추구했다는 내용을 칼럼에 적은 적이 있습니다(칼럼 136:이론형, 현장형). 김현철 교수님이나 이수형 교수님의 모습을 보면 최근 학자들은 데이터를 통해 큰 그림을 그리는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 부러워 보입니다.

법원은 다양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활용한다면 정말 큰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 생각합니다. 단순한 결과로서의 판결 분석을 넘어,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누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지, 어째서 소송을 제기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상소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느 관할법원을 선택하는지 등 유의미하게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이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법원에 올 정도로 심각한 갈등상황에 대해 어떠한 통찰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어떠한 정책이 펼쳐질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예컨대, 서울회생법원은 도산 사건을 처리하면서 여러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고, 이를 분석한 성과가 있습니다. 김희동 판사님의 ‘서울회생법원 법인회생사건 데이터입력 작업성과 및 분석결과’에서는 2014부터 2019까지의 사건 통계를 분석한 내용이 있는데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서울회생법원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만약 회생기업의 재무정보 중 유동자산과 비유동자산, 유동부채와 비유동부채의 구분된 정보, 기존 매출액 및 추정 매출액 등의 데이터가 수집되었다면 훨씬 더 많은 분석을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으로 회생기업의 어떠한 데이터를 수집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였는데, 참 와닿는 내용이 아닌가 싶습니다.

법률가로서 한 건 한 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때로는 거시적인 안목도 필요할 것 같아 여러 이야기를 적어보았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sohnho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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