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피해자 2차 가해하는 법원의 일방적 ‘형사공탁’ 감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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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피해자 2차 가해하는 법원의 일방적 ‘형사공탁’ 감형
  • 김슬아
  • 승인 2023.08.29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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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슬아 변호사(법무법인 영민, 새로운미래를위한청년변호사모임)
김슬아
변호사(법무법인 영민)
새로운미래를위한청년변호사모임

어느 날 젊고 유능한 커리어 우먼으로 승승장구하던 한 젊은 친구가 우리 법인을 찾아왔다. 높은 직급의 직장 상사에게 성추행을 당한 뒤, 직장 내에서 소문이 퍼지고 힘들게 되더라도, 다른 후배들이 같은 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아 용기를 내었다며 나에게 CCTV 영상을 하나 건넸다.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그 친구가, 난생처음 변호사 사무실 문턱을 넘기까지 어떠한 용기가 필요했는지, 그 영상자료는 모두 말해주고 있었다.

변호사로 피해자의 형사 고소대리 사건을 맡게 되면, 피해자가 수사기관에 직접 출석하여 다시금 자신의 피해사실에 관하여 수사관의 끊임없는 질문을 받는 조사과정에 동석하게 된다. 잊고 싶은 경험임에도, 가해자가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피해사실을 다시,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돌아보아야 하는 고통을 피해자는 꾹 참을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는 변호사가 피해자를 대신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므로 변호사로서도 괴롭고 힘든 일이 많았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그 과정을 견디고 나면, 피해자는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가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면 되었다. 가해자가 얼마의 돈을 가져오면서 합의를 시도하든, 피해자가 해주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것으로 피해자의 강력한 처벌의지가 법원에 전달되었고, 가해자의 처벌 수위를 결정했다. 그런데 작년 말에 피해자를 ‘위하여’ 도입되었다는 형사공탁특례 제도와 이를 감형사유로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법원의 판단은, 피해자를 법원 선고까지의 긴긴 시간 오히려 잠 못 들게 만들고 있다.

피해자는 선고까지 최소 1~2년 이상을 내내 끊임없이 자신의 처벌 의사를 입증하기 위해 엄벌탄원서를 제출해야 하고, 가해자가 공탁을 할까 봐 마음을 졸이며 고군분투해야 한다. 반면 가해자에게는 새로운 공탁제도를 이용해 법원에 감형을 촉구하기가 수월해졌다. 피해자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가능한 큰 금액을 공탁하고 그 사정을 법원에 읍소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해자와 그 대리인은 가해자가 공탁을 하더라도 제발 처벌을 해달라고 법원에 서면을 계속 제출하고, 선고 전 공탁회수동의서가 제출될 수 있게 언제 공탁이 되는지 촉각을 곤두세우며 긴장해야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물론 이마저도 선고 직전 이루어지는 소위 ‘기습공탁’의 경우에는 속수무책이다).

무엇보다도 법원이 공탁을 감형사유로 양형기준에 포함하는 주된 이유, 특히 액수가 클수록 더 적극적으로 이를 형량에 반영하는 오랜 관행에는, 가해자의 반성의지와 금전을 통한 피해자의 피해회복이라는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모든 피해가 금전으로 회복될 수 있다고 간주해도 되는 것일까? 정당한 처벌만이 피해에 대한 유일한 대가인 경우는 없는 것일까? 성추행 피해자들은 많은 경우 정신과에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진단을 받아온다. 그리고 정신과 전문의 지인은 나에게 PTSD에 가장 효과적인 약은, “가해자가 정당한 처벌을 받는 것”을 피해자가 경험하는 것이라고 한 적이 있다. 지금은 피해자 입장에서 실형을 살아야 할 가해자가 돈을 내고 집행유예가 되는 것을 경험하게 하면서 이를 피해회복으로 간주하는 격이다.

큰 액수를 공탁할수록 가해자가 더 많이 반성하고 있다고 ‘간주’하고 감형에 더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돈이 많은 사람은 억대를 공탁하여 더 많이 반성하는 것으로 여겨져 솜방망이 처벌을 살 수 있고, 가난한 사람은 전 재산을 내어놓고도 감옥에 가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죄와 벌의 질서 체계가 돈에 의해 좌우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법에 대한 신뢰와 법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요즘 나는 피해자 대리 사건을 수임하게 될 때면,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재력에 더 많은 관심과 두려움을 가지는 이상한 상황에 처했다. 피해를 당한 것은 너무 끔찍하지만, 같은 피해라면 기왕이면 공탁금을 많이 낼 수 없는 어려운 환경의 가해자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해가 바뀌자 두둑한 퇴직금을 짊어지고 나선 가해자. 피해자는 지금까지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며 낸 용기와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해자가 허망하게 집행유예로 일상으로 복귀할까 떨고 있다. 큰 액수를 공탁한 가해자를 피해자의 의사와 전혀 무관한 양형기준으로 계속 사회로 복귀시키고 있는 법원이야말로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하는 것만 같다.

김슬아 변호사(법무법인 영민)
새로운 미래를 위한 청년변호사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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