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민족대표 33인 무죄 이끈 허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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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민족대표 33인 무죄 이끈 허헌 변호사
  • 박상흠
  • 승인 2023.08.25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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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
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

민족대표 33인은 일제의 압제에 항거하기 위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3·1일 만세운동을 하기로 계획했다. 33인은 독립선언서에 날인하고 태화관에 참석했는데 일본 수사기관은 33인을 체포하고, 이들을 내란교사죄로 기소했다. 1920년 7월부터 열린 경성지방법원 제1심 공판에서 허헌 변호사는 관할관련 법리 논쟁에 불을 붙여 일본재판부를 당황하게 했다. 사건의 개요를 간단히 살펴보자. 처음 33인의 사건은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내란교사죄 등으로 경성고등법원에 수리되었다. 그런데 경성고등법원이 판단한 바에 의하면 33인은 내란교사죄가 성립되지 아니하였다. 관할위반으로 판단한 경성고등법원은 결정서 주문에 “경성지방법원을 본 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한다”고 기재하였다. 그리고 형사사건은 경성지방법원으로 이송되었다.(3·1 운동 참가자들에 대한 판결의 형사법적 의미, 길선주에 대한 무죄판결을 중심으로, 송시섭 교수 참고)

사건의 이송절차에서 형사법 절차상 하자가 존재함을 간파한 허헌 변호사는 공소불수리론을 전개하여 재판부와 검사측을 당황하게 했다. 관련 법률을 살펴보면 이해를 높일 수 있다. 당시 형사소송법에 해당하는 조선형사법령은 제1심인 공판재판소가 그 관할에 속하는 범죄를 공소를 수리할 경우는 212조의 검사의 기소가 있거나 235조의 예심판사의 기소 또는 상급재판소로부터 사건이송의 명령이 있을 때 3가지의 경우가 있다. 따라서 본 사안과 같이 경성지방법원이 처리할 사건이 경성고등법원에 수리되었고 이를 이송 처리하기 위해서는 판결주문에 “경성지방법원은 본 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함”으로 기재해서는 안 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본건을 이송처리함”으로 기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성고등법원은 단순히 경성지방법원을 본 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함으로만 표기하여 이송효과가 발생하지 못하고 경성고등법원에 계류된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이송의 효과가 발생하지 아니한 상황에서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허헌 변호사는 소각하 판결을 구한 셈이다. 결국 경성지방법원은 허헌 변호사의 변론을 받아들여 민족대표 33인을 무죄방면하여 전원 석방조치시켰다. 허헌 변호사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허헌 변호사가 이 같은 재판에서 일본 검사와 재판부와 겨루어 명승부를 이끌고 결국 승리하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 허헌은 1886년 함경북도 명천 출생으로 부친을 따라 한양에 거주했다. 규장각 주사가 되어 낮에는 관리로 밤에는 학생으로 보성학교 법과를 제1호로 졸업했다. 이후 1907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쿄의 메이지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이듬해 대한제국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로 등록했다. 학문에 폭넓은 관심을 가진 그는 국제법을 전공할 목적으로 영어와 일어, 그리고 독일어도 익혔다. 허헌 변호사가 가진 법률적 내공만으로 위와 같은 사건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실력이 있어도 그에게 독립을 향한 애국심과 염원이 불타오르지 않았더라면 열정을 가지고 변론에 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식민지의 암울한 상황에 비관하여 낙향과 은둔생활로 청춘을 낭비하던 그는 좌절을 극복하고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과 관련자 14인을 포함한 47명을 변론했다.

변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심혈을 기울였는지에 대해 그의 고백을 들어보자. “그때 나는 이 사건을 맡아서 함흥에 있으면서 석 달 동안을 침식을 잊고, 다른 사건을 일체 사절하고 그 수만 매라는 30여 책의 거창한 기록을 밤낮 들고 보고는 연구해왔는데 어찌 뜻하였으리오. 고등법원의 주문에는 사건을 경성지방법원의 관할로 지명한다는 말뿐이었고 송치한다는 정작 중요한 말이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48인의 피고인은 고등법원에도 계속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방법원으로 말할지라도 사건이 온 흔적이 없는데 수리를 할 수 없는 즉, 피고인들은 심리 받을 필요가 없이 즉시 석방되어 나와야 할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에 법정에 서서 법률을 들고 재판장과 싸워 피고인들을 아무 일 없이 석방시켜 주어야 옳은 것을 믿고서 단연히 일어났습니다.”

3·1운동이 없었더라면 국제사회에 한국의 식민지화를 알리지 못했을 것이고, 일제의 한국압제를 알리지 않았더라면 8·15광복은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민족대표 33인의 헌신의 빛에 허헌 변호사의 소금과 같은 역할이 숨어있었음을 보게 되었다. 우리는 허헌 변호사의 변론과정을 살펴보며, 정상적인 변호사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로서 탄탄한 법률지식, 민족독립을 위해 가졌던 법조인으로서의 투철한 사명감, 석 달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록을 법률을 연구한 열정 등 3박자를 갖추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오늘 한국법원이 세워질 수 있도록 헌신한 그의 노고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박상흠 변호사(법무법인 우리들)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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