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범 변호사의 ‘시사와 법’ (133)-유해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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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범 변호사의 ‘시사와 법’ (133)-유해도서
  • 신종범
  • 승인 2023.08.03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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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범 변호사
신종범 변호사

보수 성향 민간단체들이 젠더, 성평등, 인권 등을 다룬 어린이, 청소년 책이 ‘유해도서’라며 공공도서관에 “열람 제한 및 폐기”를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이에 최근 일부 도서관들이, 단체들이 민원을 제기한 도서출판물 117종의 유해성 여부를 심의해달라고 간행물윤리위원회에 의뢰했다고 한다. 보수 성향 단체들이 ‘유해도서’라고 주장하는 도서들은 <10대를 위한 성교육>, <꽃할머니>, <어린이 페미니즘 학교>, <달라도 친구> 등 대체로 젠더, 성평등, 인권 등을 주제로 삼은 책들이다. 그 중 허은미 작가의 <달라도 친구>는 성격, 외모, 취향, 장애, 가족구성, 인종 등이 각각 다른 아이들을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화로, 교과서에도 수록돼 있다. 권윤덕 작가의 <꽃할머니>는 2007년 한·중·일 작가들이 ‘평화’라는 주제로 그림책을 동시 출판하기로 해 권 작가가 ‘위안부’ 피해 여성 심달연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그림책이다. 권 작가는 최근 세계적인 아동문학상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HCAA) 2024년 한국 후보로 선정되는 등 국제적으로도 인정받는 작가다.

‘유해도서’에 대한 기사를 보고 지난 날의 한 사건이 불현듯 떠올랐다. 15년전 군법무관으로 근무할 때 일이다. 국방부에서 뜬금없이 ‘불온서적’이라며 그 목록과 함께 해당 서적의 군내 반입을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군사정권 시절에나 있었던 불온서적 이야기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당시 적잖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불온’하다는 의미는 “온당하지 않음”. 즉, “판단이나 행동 따위가 사리에 어긋남”이라는 뜻이다.

당시 국방부가 “사리에 어긋난다”고 발표한 서적들을 보자. <북한식 우리의 문화>(주강현), <지상에 숟가락 하나>(현기영),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노엄촘스키),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대한민국 사(史)>(한홍구), <세계화의 덧>(하랄트 슈만, 한스 피터 마르틴) 등이다. 국내외 저명교수의 책, 당시 인기가 높았던 TV 프로그램에서 권장도서로 소개한 책, 그리고 대학교 교양교재로 널리 쓰이고 있는 책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국방부는 무슨 기준으로 이러한 책들을 불온서적으로 선정한걸까? 국방부는 당시 대학가 운동권단체인 한총련에서 군내 도서보내기 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첩보를 듣고 한총련이 보내려고 한다는 도서 목록을 입수한 후 재분류하여 총 23권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하였다. 소위 좌파 운동권세력이 선정한 책이니 책 내용도 보지 않고 불온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그후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 국방부의 지침대로 선정된 불온서적이 군내에 반입될 수는 없었지만 군 밖 세상에서는 해당 서적들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휩쓸었다. 이미 출간된 지 꽤 지난 책들도 말이다. 장병들도 군내에서는 읽을 수 없었지만 휴가 나가서는 많이들 읽었다. 어릴 적 읽지 말라고 하면 호기심에 어떻게든 더 찾아 읽어보려했던 심리랑 똑같은 이유일게다. 당시 저술한 책 2권이 불온서적으로 선정된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 노엄촘스키는 "불온서적 판매량 증가는 한국인들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국방부가 자유를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통제하려 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국방부는 지침을 내려 불온서적이라고 판단한 서적의 군내 반입은 강제로 막을 수 있었지만 장병들의 읽을 자유를 완전히 뺏을 수는 없었다.

당시 나는 군 간부였지만 행정기관이 나서서 책을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군인이라는 이유로 읽을 자유를 침해하는 조치에 대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군법무관들 사이에 법적으로 다투어 보자는 얘기들이 나왔고 뜻을 모은 몇 군법무관들이 국방부의 불온서적 선정과 그 근거인 군인복무규율에 대하여 헌법소원을 청구하였다. 그러자 국방부는 헌법소원을 청구한 법무관들을 색출하여 징계에 나섰다. “헌법상 권리인 재판청구권 행사로 헌법소원을 청구한 것이 징계사유가 될 수 있느냐”라는 또 다른 논란이 있었지만 법무관들을 징계함으로써 군내에서 일고 있는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었기에 징계는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특히, 2명의 법무관은 그전에는 언제 있었는지 확인도 되지 않았던 파면 처분을 당했다. 다행히 행정소송에서 파면은 취소되었지만 그동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시 불온서적 반입 금지 조치 후 과연 그 조치대로 실행되었을까?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몇 군데 부대 도서관을 가보니 불온서적으로 선정된 도서들이 그대로 비치되어 있었고 장병들은 무엇이 불온서적으로 선정되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작금의 ‘유해도서’도 15년전 ‘불온서적’의 전철을 밟고 있는 듯 하다. ‘유해도서’로 알려진 책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져 해당 도서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책을 읽고 토론회를 연다는 소식들이 들리고 있다. 역사적으로 읽을 자유를 제한하는 어떠한 시도도 성공하지 못했다.

신종범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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