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25-경험의 압도적 무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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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25-경험의 압도적 무게감
  • 손호영
  • 승인 2023.06.2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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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경험과 관찰은 개인적입니다. ‘특정한 시기, 특정한 장소, 특정한 조건’에 매여 있습니다. 나의 경험과 관찰이 모두에게 통용되리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내가 비 오는 날 고백해서 알콩달콩 연애를 시작했다고, 누구나 그러리란 법 없습니다. 사적 경험과 관찰을 보편으로 바로 전환시키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대신 경험과 관찰은 직관적이고 감각적입니다. 어떤 규칙이나 전제로 무리하게 승화시키기를 자제하기만 한다면, 경험과 관찰은 여전히 의미 있고 때로는 압도적 무게감을 가집니다. 구체적인 과거 사건을 재구성하고 사실 확인을 하고자 할 때, 그만이 할 수 있는 경험, 그만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었던 관찰은 더없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범죄의 피해자나 목격자의 진술이 재판에서 결정적 증거가 되는 이유입니다.

미성년자인 피해자가 자신을 보호해주는 가족으로부터 성범죄를 당했다고 말할 때, 정말 그의 말이 사실인지 믿어야 할지를 판단하기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물적 증거도 없고, 목격자도 없는 경우 갑갑하기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판사가 답답한 상황 속에서 피해자의 말을 자세하고 빈틈없이 살펴본 뒤 믿고자 함은, 그만이 겪어낸 ‘경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경험과 관찰이 가진 무게감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보호자의 형사처벌을 무릅쓰고 스스로 수치스러운 피해 사실을 밝히고 있고, 허위로 그와 같은 진술을 할 만한 동기나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진술 내용이 사실적·구체적이고, 주요 부분이 일관되며, 경험칙에 비추어 비합리적이거나 진술 자체로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면, 그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대법원 2020. 5. 14. 선고 2020도2433 판결).”

경험과 관찰은 독자나 청자의 감정을 움직이는 파토스(pathos)적 논증에서도 힘을 발휘합니다. 시나리오 작가였던 아래층 청년이 “사모님 안녕하세요, 1층 방입니다. 죄송해서 몇 번을 망설였는데... 저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번번이 정말 죄송합니다.”라는 내용의 쪽지를 붙여놓아, 집주인이 뒤늦게 찾아갔을 때는 이미 청년이 숨져 있었다는 목격담은 복지 제도의 개편을 부르짖는 절절한 근거가 됩니다. 자칫 ‘감정에의 호소’라며 논리적 오류로 치부될 수 있는 경험과 관찰은 다르게 보면,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되는 것입니다. 판사는 형사 사건에서 피고인이나 피해자가 제출하는 반성문과 탄원서를 요약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생생한 진술을 판결에 남겨, 피고인에게 정한 처벌의 수위가 정당하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다만, 경험과 관찰이 논증의 효과적 재료로 쓰이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을 점검해야 합니다. 첫째, 경험과 관찰이 정상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졌는지, 둘째, 경험과 관찰 당사자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셋째, 경험과 관찰 당사자가 사안과 특별한 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넷째, 경험과 관찰 당사자에게 무의식적 편견과 선입견은 없는지, 다섯째, 경험과 관찰 당사자가 사례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평가하지는 않는지 등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각 조건을 통과한 경험과 관찰은 논증의 강력한 근거가 될 것입니다.

경험과 관찰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조건을 반대로 하면, 경험과 관찰을 일소에 부치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특히 경험과 관찰을 한 사람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묻는 것은 중요합니다. 논리학에서는 ‘사람에의 호소’를 오류라고 합니다. 한 사람의 개인적 특성 즉 나이, 성별, 인종, 국적, 직위 등에 근거하여 비판하는 것은 오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논증에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양치기 소년은 ‘성실하고 선량한 아이’였습니다. 소년을 향한 어른들의 시선은 너그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느 날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습니다.”고 소리쳤을 때, 어른들이 모두 믿은 이유는 그의 사람됨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긴가민가하면서 한 번 더 믿은 이유도 아직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재차 배신당했을 때, 어른들은 소년을 ‘거짓말쟁이’로 치부했습니다. 이제 소년이 다급하게 다시 말합니다.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정말 늑대가 왔는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거짓말쟁이’ 소년이 ‘진실을 말할 확률’과 ‘다시 거짓을 말할 확률’을 저울질합니다. 어느 확률이 더 높을지 정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비록 우화에서는 정말 늑대가 나타났지만 어른들의 당시 사고는 틀리지 않았다고 하겠습니다).

법률가는 사실관계를 확정할 때, 여러 사람의 경험과 관찰을 듣습니다. 물적 증거와 정황으로 대조해가며 그들의 경험과 관찰을 믿을 수 있을지 판단하고, 믿을 수 있다면 그의 말에 따라 물적 증거가 확인해주지 않는 사실관계를 채워 넣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경험과 관찰을 다루는 것에는 신중함을 우선으로 해야겠습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sohnho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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