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10-판사의 문장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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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110-판사의 문장론
  • 손호영
  • 승인 2023.03.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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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판사가 갖추어야 할 당위의 문장과 판사가 현재 쓰고 있는 현실의 문장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관점의 차이를 발견하고 왜 그러한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을 논의할 때, 우리는 그것을 ‘문장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른바 ‘판사의 문장론’입니다.

판사의 문장론이 어려운 주제임은 분명합니다. 문학에서는 다채로운 문체가 잔치를 벌여 그 다양성을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판결에서는 하나로 정리할 수밖에 없는 일률성이 문장론을 말하기 답답하게 합니다.

물론, 판사도 개인이므로 고유한 문체가 없을 리 없습니다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이름난 판결도 있습니다. 이미 지난 칼럼에서 인용한 판결이지만 한 번 더 인용해봅니다.

75세 노인이 아내를 병수발 하던 와중입니다. 자신과 아내를 건사하기도 쉽지 않던 노인은 딸에게 돈 관리를 맡겼고, 자신들이 살게 될 임대주택 임차인 이름도 딸 이름으로 했습니다. 대한주택공사가 무주택자 임차인에게 임대주택을 분양하기로 결정했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형식상 임차인인 딸은 당시 다른 주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 거주자인 노인은 임차인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주택을 분양받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대한주택공사는 노인에게 퇴거를 요구했습니다.

2심 판사는 이 사건에서 임차인은 ‘실질적 의미의 임차인’이어야 한다며, 실제 거주자인 노인은 실질적 임차인이므로 퇴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습니다. 이때 펼쳐낸 문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가을 들녘에는 황금물결이 일고, 집집마다 감나무엔 빨간 감이 익어 간다. 가을걷이에 나선 농부의 입가엔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바라보는 아낙의 얼굴엔 웃음꽃이 폈다. 홀로 사는 칠십 노인을 집에서 쫓아내 달라고 요구하는 원고의 소장에서는 찬바람이 일고, 엄동설한에 길가에 나앉을 노인을 상상하는 이들의 눈가엔 물기가 맺힌다. 우리 모두는 차가운 머리만을 가진 사회보다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함께 가진 사회에서 살기 원하기 때문에 법의 해석과 집행도 차가운 머리만이 아니라 따뜻한 가슴도 함께 갖고 하여야 한다고 믿는다. 이 사건에서 따뜻한 가슴만이 피고들의 편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머리도 그들의 편에 함께 서있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이다.”

황금들녘 판결은 문장론 소재로 삼기 마땅합니다. 올바른 법 해석 방향이라는 깊이 있는 주제의식, 판결 전반을 구성하는 이성적 논증(logos)과 말미에 활용된 감성적 논증(pathos), 흠잡을 데 없이 간결하면서 충실한 문장, 지금까지 인용될 정도의 인지도와 생명력 등 분석하고 감상할 만한 이유는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판결을 대표로 판사의 문장론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주저하게 됩니다. 희귀하기 때문입니다. 황금들녘 판결은 2006년 선고되었는데, 여지껏 황금들녘 판결 이외에 다른 어떤 판결이 빼어난 문장과 문체로 세상에 언급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황금들녘 판결이 상고되었을 때 대법원조차 황금들녘 판결의 문체에 화답하지 않았습니다. 으레 그러하듯, 황금들녘 판결이 제시한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정직한 문체로 짚었을 뿐입니다. 유려한 문장을 심판 대상으로 만났으니 수려하게 답하고 싶은 마음을, 대법원은 자제했습니다.

판사의 문장은 대체로 건조하고 얌전하며 누가 보더라도 ‘판사가 쓴 판결이다.’고 알 정도로 한결같습니다. 익숙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효율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실용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재미없고 길며 낯설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지적은 유구합니다.

판사의 문장을 모범으로 내세울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고, 판사의 문장론을 말할 때 판사의 문장이 현재 지켜나가는 원칙과 추구하는 이상을 함께 이야기할 필요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판사도 자신이 펼치는 논증에 알맞은 문장을 되새기고, 이상을 좇음으로써 더 나은 문장을 과녁으로 삼아 정진해야 합니다.

“남이 쓴 문장이든 내가 쓴 문장이든 문장을 다듬는 일에는 정답이 없다. 맞춤법이나 띄어쓰기처럼 맞고 틀리고를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그렇다.” 문장수리공 김정선이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만, 사법연수원에서 말하는 좋은 판결의 문장은 한번 짚고 넘어가면 좋겠습니다.

[판결서의 문장은 주어, 술어, 목적어 등을 명백히 하고 이를 적절히 구사하는 등 문법에 맞게 기술하여야 한다. 문체는 논리적이면서 의미가 함축된 일의(一義)적인 것임과 동시에 간결・명료하여야 한다. / 또한 문어체를 피하고 구어체에 따른 일반 상용어를 사용하여 가급적 쉽고 부드럽게 표현하여야 한다 / 판결서는 작성자인 법관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하면서도 공문서로서의 품위와 격조를 유지하여야 하므로 속된 표현이나 격하고 주관적인 표현은 삼가야 한다. / 판결은 법원이 인정한 사실에 터 잡아 법령을 적용・판단한 결과이므로 법령에 표현된 문구를 사용하는 것이 무난하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법학박사
sohnho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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