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87-판사의 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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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 공부 87-판사의 유머
  • 손호영
  • 승인 2022.09.2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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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법정은 엄숙하고, 재판은 딱딱한 것이 보통입니다. 서로의 옳음을 판가름 받고자 하는 당사자들이 느긋할 수 있겠습니까. 치열하고 진지하다보면, 근엄하고 심각해지기 일쑤입니다. 이럴 때, 종종 판사의 재치가 빛을 발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법정의 공기를 일순 환기시키는 판사의 유머를 살짝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판사와 유머는 사실 도대체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입니다. 돌 된 아기와 점잖음(돌 된 아기는 진짜 떼가 장난 아닙니다), 사랑에 빠진 이와 고요한 마음(사랑에 빠지면 두근대다 못해 가슴이 터지겠죠) 같은 식입니다. 그래도 가끔 판사의 유머가 통할 때가 있습니다. ‘괜찮은데?’를 넘어 ‘우와’라는 경탄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유머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그 정도가 지나쳐, 연구까지 하는 무리수를 둔다는 것입니다. 라이언 맬퍼스(Ryan Malphurs)는 미국 연방대법원의 대법관들의 유머가 웃음을 얼마나 유발했는지 일일이 세어 봅니다. 연구대상은 ‘유머’인데, 그의 연구는 학문적이어서 재미가 있을 리가 없죠. 그러다보니, 그는 “이 글에서 유머를 기대한 독자들은 돌아가시기 바랍니다.”라는 경고문을 넣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를 비롯해 몇 명이 작성한 논문은 연방대법관의 유머 몇 토막을 저희에게 알려주는 역할만큼은 성실히 수행합니다.

연방대법원 법정의 전구가 재판 도중 갑작스레 깨졌습니다. 마침 할로윈이었기에, 이제 막 대법원장이 된 존 로버츠(John G. Roberts Jr.)는 농을 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대법원장이 오면 매번 하는 장난입니다.” 지금은 작고한 안토닌 스칼리아(Antonin Scalia) 대법관이 익살스레 대꾸합니다. “해피 할로윈.”

한 변호사가 데이비드 수터(David H. Souter) 대법관에게 스칼리아 대법관이라고 잘못 호칭했습니다. 변호사가 사과하자 수터 대법관이 특유의 자기비하 농담을 개시합니다. “감사합니다만, 사과는 스칼리아 대법관에게 하시면 됩니다.”

자, 이 두 에피소드를 듣고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면, 다행입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아마 아메리칸 스타일이라 취향에 안 맞는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판사의 유머를 몇 토막 소개해봅니다. 취향에 맞으실까 우려는 됩니다만.

언젠가 원고와 피고가 격하게 다투는 사건에 할머니께서 증인으로 출석합니다. 원고와 피고는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며 증인의 말허리를 자릅니다. 판사는 원고와 피고를 달래며 겨우겨우 증인신문을 마칩니다. 고생하셨다 싶어 판사가 증인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할머니, 수고 많으셨습니다.” 증인이 가볍게 웃으며, “판사님, 이왕이면 할머니 말고 누나라고 해주세요.”라고 눙칩니다. 순간 법정이 고요해집니다. 판사가 그 말을 듣고 으쓱 하더니 느긋하게 이렇게 대답했다네요. “네, 누나.” 법정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고 합니다.

소말리아 해적 일당이 우리나라 선박을 납치했습니다. 청해부대가 출동해서 해적을 소탕했죠. 그 아덴만 여명 작전입니다. 판사는 작전 이후에 수습하는 일을 맡았는데, 생포한 해적 몇을 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1심에서 해적들은 중형을 선고받았기에, 1심 법정은 당연히 무겁고 침울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2심 재판장은 최인석 전 울산지방법원장님이셨으므로, 2심 분위기는 조금 다르게 흐릅니다.

소말리아 통역인이 기차를 늦게 타서 재판이 1시간 반 가량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최인석 재판장이 말합니다. “이번 재판 주연이 저인 줄 알았는데 다른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법정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지는 순간입니다. 통역인이 여전히 도착하지 않고 법정 내 침묵이 계속되자 한 마디 더 보탭니다. “오늘 지각한 소말리어 통역인도 판사 생활 25년 경력인 저보다 일당이 비쌉니다.” 방청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최후 진술에서는 요리사였던 해적이 5분 넘게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최인석 재판장이 농담을 건넵니다. “음식을 요리하는 게 아니라 말을 요리하는 사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말리아에서 정치할 사람인지 물어봐 주십시오.” 그 물음을 받은 해적이 다시 한국 구치소 생활이 좋다며 말을 계속 이어가자 최인석 재판장이 한탄 아닌 한탄을 합니다. “말을 시키지 말았어야 했는데 제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방청석에서 웃음소리가 나왔다고 합니다.

할머니 누나 에피소드는 문유석 전 부장판사님이 건너건너 전해들은 전설 같은 이야기이고, 최인석 재판장의 에피소드는 실제 기자들의 생생한 취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어떤가요? 코리안 스타일은 조금 취향에 맞으시는지?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은 넉넉하고 여유로운 태도와 자세를 나타낸다고 생각합니다. 수준 높은 유머를 구사한다? 그는 품 넓은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수험을 할 때 고되고 지치기 마련입니다. 그럴수록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수험은 장기전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멀리, 길게 보고 가시길 바라봅니다.

손호영 서울회생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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