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두 멘델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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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두 멘델스존
  • 최용성
  • 승인 2022.05.0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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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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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사람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는 계절이다. 대지를 수놓은 꽃들이 뿜어내는 총천연색 빛깔과 나무와 풀이 발산하는 신록(新綠)이 눈부신 계절이다. 생명의 탄생과 부활을 느끼는 시기이다. 그래서 봄을 그리는 음악은 밝고 건강하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의 첫 악장은 시작부터 활기차다. 중후하고 투쟁적인 이미지로 알려진 루트비히 판 베토벤도 봄을 그릴 때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이다. 그의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봄>을 들어보라. 어디에도 어두운 구석은 없다. 그저 아름답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희망이 가득하다. 로베르트 슈만의 첫 번째 교향곡 <봄>에서는 생명의 에너지가 약동한다. 노르웨이 작곡가 크리스티안 신딩의 피아노곡 <봄의 속삭임>을 듣다 보면 그 설렘이 봄을 그린 우리의 아름다운 가곡들의 노랫말을 떠오르게 한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피아노곡집 「무언가」(無言歌. ‘가사 없는 노래’라는 뜻) 중에서 <봄노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냥 들으면 “야, 봄이다”라고 탄성을 지르게 되는 명곡이다. 봄의 신부 그중에서도 “5월의 신부”가 가장 행복하다는 속설이 있는데, 마침 멘델스존은 결혼행진곡도 작곡하였으니 봄의 작곡가로 손색이 없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서양음악사에서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위대한 음악가이다(나치의 반유대주의에 따라 금지된 여파로 인하여 독일, 나치 독일을 추앙한 일본, 심지어 우리에게까지 그 부정적 영향이 남아 과소 평가되기도 한다). 펠릭스에게는 누나 파니가 있었다. 파니도 펠릭스처럼 음악 천재였지만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의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문제였다. 19세기 유럽에서는 상류층 여성이 직업 음악가로서 활동하는 것을 곱게 봐주지 않았기 때문. 집 안의 최고 권력자인 아버지는 파니가 음악가로 살아가는 것에 반대하였고, 악보도 출판하지 못하게 막았다. 파니를 아끼고 그 재능을 높이 평가한 펠릭스조차 당시의 사회통념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결국 파니는 직업 음악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재능이 어디 갈 리 없으니 가곡이나 피아노곡, 실내악곡 등을 중심으로 꽤 많은 곡을 작곡하였고, 그중 몇 곡은 아버지의 금지령을 우회하여 펠릭스의 이름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펠릭스는 그 곡이 파니의 곡임을 밝혔으니 훔쳤다고 오해하지 말기를!).

파니와 펠릭스는 서로에게 음악적 반려자 같은 존재였다. 40대가 되어서야 파니는 남편의 성을 딴 파니 헨젤이라는 이름으로 첫 가곡집을 출판한다. 동생과 상의하지 않고 벌인 일이었는데, 펠릭스는 걱정 반 격려 반의 반응을 보인다. 음악가로서 새로이 출발하려는 파니를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2년도 되지 않은 마흔두 살에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난 것. 펠릭스는 엄청난 충격과 슬픔 속에서 파니를 위한 진혼곡으로 마지막 현악사중주곡을 완성한 뒤, 거짓말처럼, 누이와 같은 해에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파니가 펠릭스보다 더 뛰어난 천재였는데 남동생을 위하여 억압당했다는 서사는 진실이 아니다. 하지만 여성 음악가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당대의 인습에 갇혀 자신의 천재성을 더 활짝 꽃피울 기회를 얻지 못했다는 것은 진실이다. 우리 시대에는 또 다른 파니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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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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