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안녕, 대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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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안녕, 대한극장
  • 최용성
  • 승인 2024.05.03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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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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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플렉스가 일반화되기 전 영화관은 모두 단관이었다. 한 극장에 영화 한 편이 상영되었다. 개봉관 수는 많지 않아 볼 수 있는 영화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한 해 개봉한 모든 영화를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영화애호가나 전문가에게 편한 점도 있었다. 개봉관을 정점으로 재개봉관, 재재개봉관, 재재재…이런 식의 피라미드 구조로 영화 필름은 아래 등급의 극장으로 옮겨 상영되었다. ‘재’자가 많이 붙을수록 영화관람료는 떨어지는 대신 극장의 규모와 시설은 열악해진다. 아래 등급으로 내려갈수록, 상영 횟수가 늘어나 필름이 열화되어 화면에서 비가 내리거나 상영 중 필름이 끊어지기도 하였다. 그래도 아래 등급으로 갈수록 2편의 영화를 동시상영하는 곳도 있었으니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젊은이들에게는 단비와 같은 선물이었다. 요즘 디지털 방식의 멀티플렉스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그런 극장 시스템의 최정상에 있던 영화관이 퇴계로에 있는 대한극장이었다. 1958년 개관한 대한극장은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70밀리 대형영화를 제대로 상영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극장이었다. 내가 처음 대한극장에 간 기억은 어머니 손을 잡고 한국 만화영화 <괴수대전쟁>을 볼 때였는데, 이때만 해도 대한극장이 얼마나 대단한 극장인지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그 뒤 중학교 다닐 때 옆집 형 덕분에 윌리엄 와일러의 <벤허>(1959)를 봤는데 필름이 낡아서인지, 아직 안목이 안 되어서인지, 뭐가 뭔지도 모르고 봤던 것 같다. 진정한 감흥은 1981년 <벤허>를 새로 수입하여 새 필름으로 상영하였을 때이다. 당시 대한극장은 70밀리 영사기와 음향시설을 완전히 새로 바꾸고 그 기념으로 <벤허> 새 필름을 수입 상영한다며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관람료도 보통 개봉 영화보다 훨씬 비쌌다. 그때 비로소 좌우로 넓게 펼쳐진 곡선형 70밀리 대형화면에 6채널(광고에서는 6본 트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입체음향이 주는 위력에 압도되고 말았다. 마치 내가 로마제국의 광장이나 예루살렘의 전차경주장에 있는 것 같은 대단한 체험이었다. 함께 영화에 몰입하는 관객들의 아기자기한 분위기,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웃고, 울고, 분노하고, 선이 악을 제압할 때는 약속이나 한 듯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지는, 같은 장소에서 같은 느낌을 공유하는 묘한 일체감은, 요즘 기준으로는 촌스러울지 모르지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감격을 주었다. 미클로시 로자의 탁월한 음악 덕분에 감동은 더 배가되었다. 이것은 내 영화 체험의 기준이 되었고, 대한극장을 가는 일은 늘 가슴이 설레는 경험이었다.

대한극장은 당시 다른 단관 극장이나 요즘 멀티플렉스와는 질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 크레딧 타이틀이 나올 때 대한극장은 그것을 끝까지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조명을 켜지 않음으로써 영화의 감흥을 길게 느끼고 싶은 진짜 영화 팬들을 배려하였던 것. 대한극장이 단관 시절 내내 그 전통을 고집한 것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적어도 내가 경험했던 단관 시절 대한극장은 그랬다. 당시 크레딧 타이틀을 끝까지 보여주는 극장이 거의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보자면, 이것은 상영기사 분의 영화에 대한 애정과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나는 추측한다. 심지어 <벤허>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장면의 관람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상영 중 늘 켜있는 최소한의 안내등과 비상등마저 그 순간에는 모두 꺼서 영화의 또 다른 클라이맥스에 집중하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그처럼 지극히 영화 팬을 배려하는 영화관은 다시 만나기 어려울 것이다.

멀티플렉스 시대가 오자 대한극장은 단관 고별 상영작으로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상영하였다. 빛바랜 70밀리 화면과 낡은 음향 속에 상영되는 걸작을 보며 한 시대가 저물어감을 느꼈다. 그렇게 단관 대한극장은 사라지고, 멀티플렉스로 바뀌었는데 2024년 9월 말에 영화관을 닫고 문화공연장으로 탈바꿈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서울의 스카라극장, 국도극장, 원주의 아카데미 극장 같은 문화적 공간을 철거하는 반문화적 사회에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안녕, 내게 영화와 인생을 가르쳐준 소중한 공간 대한극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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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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