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열여덟 살이 두려운 아이들
상태바
[칼럼] 열여덟 살이 두려운 아이들
  • 최용성
  • 승인 2021.07.02 10: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인생은 아름답고 세상은 멋지다. 서로 통하는 이들이 함께 모여 보내는 즐거운 자리, 사랑하고 사랑받는 느낌, 희망을 품고 노력할 때 찾아오는 성취감, 영혼을 울리는 아름다운 음악, 마음을 흔드는 책, 미각을 사로잡는 음식과 술, 아침마다 떠오르는 해, 붉은 노을의 장관,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눈부신 초록빛, 화려한 단풍잎, 눈으로 뒤덮인 고요한 풍경, 장대한 산맥, 도도히 흐르는 강줄기, 대지와 바다가 만나는 갯벌…. 지구에 온 우리가 감사히 즐길 거리가 많다. 그렇지만 인생은 고단하고 세상은 삭막하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평범한 사람이든 모두 저마다 자신만의 고단함이 있다. 세상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비정하다. 그래도 우리가 버틸 수 있는 것은 그 고단함 속에서 아름다운 인생과 멋진 세상을 순간이라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 그런데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더 고단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 고단함은 세상의 무관심과 결합하여서 한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존엄과 가치를 삼켜버린다. 불행하게 아이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더 쉽다.

헌법 제34조 제4항은 “국가는…청소년의 복지향상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의무를 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아동복지법은 “아동이 건강하게 출생하여 행복하고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아동의 복지를 보장하는 것”을 법의 목적으로 삼으면서 기본이념으로 아동이 자신 또는 부모의 성별, 연령, 종교, 사회적 신분, 재산, 장애 유무, 출생지역, 인종 등에 따른 어떠한 종류의 차별도 받지 않으면서, 완전하고 조화로운 인격발달을 위하여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행복하게 자라나야 함을 내세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아이들이 평등하게 행복을 누리며 안전하게 자랄 수 있도록 돌보는 부담을 주로 부모의 몫으로 떠넘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의 현재와 미래는 부모가 누구냐에 따라 극과 극으로 갈리게 된다. 아이들은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하지 않고, 완전하고 조화로운 인격발달을 위한 안정된 가정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부모들이 고단한 삶 속에서 느끼는 피로와 불안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이된다. 양육과 교육을 한 가정의 일로만 미루어둘 수 없는 이유이다. 그래도 고단하고 가난한 생활이지만 부모로부터 돌봄을 받는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그나마 낫다. 아예 돌봄을 받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에 부닥친 아이들이 있다. 아동복지법은 이런 아이들을 보호대상아동으로 정의한다.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로부터 이탈된 아동 또는 보호자가 아동을 학대하는 경우 등 그 보호자가 아동을 양육하기에 적당하지 않거나 양육할 능력이 없는 경우의 아동이 그들이다. 보호대상아동을 친족인 사람의 가정에서 보호·양육할 수 있게 하거나, 적합한 유형의 가정에 위탁하여 보호·양육할 수 있게 하거나, 보호조치에 적합한 아동복지시설에 입소시키거나 보호조치를 취하여야 한다. 이 중 아동복지시설에 입소한 아동에게는 더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하다.

아동복지법에서는 아동을 18세 미만인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고, 보호대상아동의 나이가 18세에 이르면 시설에서 퇴소시켜야 한다고 못 박고 있다. 법률에서 “퇴소시켜야 한다”라고 하고 있어서 18세에 이른 보호대상아동이 처한 상황이나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반드시 퇴소시켜야 한다. 재량 여지가 없는 의무조치인 셈이다. 이것이 합리적인 기준일까? 부모와 함께 생활하다가 막 18세가 된 청소년은 반드시 집을 나가 독립하여 살아야 한다고 법이 강제한다고 상상해보라. 대한민국의 부모나 청소년 중 이를 수긍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한 사회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은 나이로만 환산할 수 없다. 어제까지 보호를 받던 청소년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교 졸업장이 기본 학력처럼 필요하고, 주거비가 비싸며, 사교육비가 많이 드는 사회에서 어른이 되는 데에는 한참 더 시간이 걸린다. 노동에 대한 부담 없이 자신을 스스로 찾아갈 방황의 시간도 필요하다. 18세가 되어 시설을 퇴소한 ‘보호종료아동’에게 일정한 경제적 지원이 있지만, 실제 이들이 처하는 사정은 참으로 딱하다. 우선 대학교에 다닐만한 형편이 되지 않는다. 자립생활관에 들어가도 낮에는 방을 비워야 한다. 빈둥거리며 스스로가 누구인지 찾아갈 자유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공간인 셈이다. 결국, 생계를 위하여 돈을 버느라 삶은 더 고단해진다. 뒷받침해줄 든든한 울타리 자체가 없다 보니 존재의 근거가 흔들리고 우울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국가는 보호대상아동을 행복하고 안전하게 잘 키워 세상에 내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표가 되지 않기에 이 아이들의 고통은 국회에서 외면받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청소년에 관심 있는 모든 이들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여야 한다. 퇴소연령을 현실적인 기준으로 올리고, 퇴소 시점이 오더라도 개개 아이들의 의사나 상황을 반영하여 퇴소 시점을 늦추거나 적절한 절충 방안을 모색할 길이 열려야 한다. 대학교 과정이 의무교육의 대상은 아니지만, 학업에 종사하려는 보호대상아동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다. 더는 열여덟 살이 두려운 아이들이 없도록 국가와 사회가 나서야 한다.

최용성 변호사·법무법인 공유
차용석 공저 『형사소송법 제4판』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