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 5-롤모델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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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판사의 판례공부 5-롤모델의 중요성
  • 손호영
  • 승인 2021.01.2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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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퍼스트 무버(first mover)가 되기란 쉽지 않습니다. 빛나는 통찰력, 감출 수 없는 천재성, 놀라운 기억력 등 퍼스트 무버에게 요구되는 능력과 자질은 적지 않습니다.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는 그나마 접근 가능한 것 같습니다. 재빠른 눈치, 적절한 응용력, 끈질긴 성실함 등 자세와 태도가 뒷받침된다면 자못 괜찮은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할 때, 나보다 앞서 나간 이의 행적을 알 수 있다면 많은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허허벌판에서 기초를 세워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당연히도 퍼스트 무버인 롤모델을 찾을 수 있고, 그에게 조언을 얻거나 성실히 모방하고 흉내 낸다면, 적어도 패스트 팔로워는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수험을 하는 입장에서는 법률저널에 최근 올라오는 여러 합격수기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부를 하면서 막연할 때 방향을 제시받을 수 있는 여러 방편 중 하나가 아닐까 합니다. 좋은 점들을 조합해서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고, 꾸준히 해나간다면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새삼스레 돌이켜보니, 저도 수험생활에서 어깨너머로 배울 롤모델을 찾기 위해 합격수기를 어지간히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절에서 공부했다거나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를 엮어 놓은 합격기가 당시에도 여전히 있었지만, 현실감이 없었습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의 롤모델은 없을까, 읽으면서 심기일전할 수도 있고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유용한 합격수기는 없을까, 두리번거리던 중 마침 만난 합격수기가, 법관을 거쳐 지금은 모교 교수님으로 계신 H교수님의 사법시험 수석합격기입니다.

합격기는 무척 진솔했고, 구체적이었습니다. 무거운 단어가 연이어 사용되며 표현되는 수험생활은, 나만 힘든 것이 아니구나, 탁월한 분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치는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여 오히려 위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인 로드맵과 그의 실제 수행 사례의 차이를 보면,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지나치게 로드맵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다는 안심도 되었습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H교수님이 수험생 당시에도 평석집, 논문 등을 참고하였다는 것입니다. 교과서를 읽기에도 바쁜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하는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게 되면서, 그때부터 저도 책을 읽다 궁금한 사항이 생기면 메모해두었다가 열람실에 비치된 주해를 찾아보거나 논문을 찾아보는 식으로 흉내를 내보았습니다. H교수님이 글을 마무리 지으며 제시한 원칙 중 하나는 지금도 의미가 있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시험장에 들어가 있을 때 말고는 절대로 내 자신을 믿지 않았다.’, ‘자신감을 잃어버리면 안 되겠지만 자족감을 느끼는 순간만큼은 반드시 경계해야 한다.’ 이미 훌륭했던 그조차 이러한 마음가짐이라면, 그보다 부족한 팔로워로서 저는 더욱 마음을 가다듬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수험을 넘어 실무에 접어들었을 때도 롤모델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배석 때에는 부장님들의 노하우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단독이 되어서는 동료 법관들의 경험과 생각을 자주 묻고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메모를 하는 법, 레퍼런스를 찾는 법, 사건을 정리하는 법, 판례를 인용하는 법 등 보고 들으며 한참 배우게 되었습니다.

다만 수험생과는 달리 실무의 업무과정은 한결같아, 언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대체로 명확하기에, 일정에 대해 로드맵을 그려주는 합격기 같은 것보다는, 구체적 사건에 대한 질문에 먼저 답해야 했던 이의 고민과 그 결론을 탐색하는 중요성이 더욱 커집니다. 다행스럽게도 먼저 질문에 답해야 했던 이는 그 과정을 상세하고 친절히 판결문이라는 형태로 그 고민을 정리해둡니다. 실무에서는 판례가 퍼스트 무버가 남겨 놓은 지침이자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서류를 건네주면서, 사실은 ‘근저당권설정계약서’인데, 이를 ‘토지거래허가 등에 필요한 서류’라고 속여 서명·날인하게 하고, 이를 이용해 피해자 소유의 토지에 관하여 제3자에게 근저당권을 설정해 준 사안을 사건으로 만나는 경우를 상정해봅니다(2016도13362).

이른바 ‘서명사취’ 사안인데, 처음 보게 되면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판례를 찾아보면, 판례가 고민한 지점들이 섬세하게 제시되어,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염두에 두어야 할지 단서를 얻을 수 있습니다. 과연 서명사취란 무엇이고, 책략절도와는 뭐가 다른지(82도3115), 사문서위조와는 어떤 관계인지(2000도778), 서명사취와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 인장사취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81도1732), 나아가 서명사취 사안을 민사법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어떤지(2004다43824, 2006다41778) 등 여러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퍼스트 무버가 남긴 판례의 각 논점을 모두 검토하여 소화한 뒤, 그 논의를 모두 담은 채,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 답을 해낼 수 있다면, 적어도 준수한 패스트 팔로워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와 같은 패스트 팔로워의 역할을 성실히 해나가다보면, 새로운 사건에 직면했을 때, 퍼스트 무버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손호영 의정부지방법원고양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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