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연 미국변호사의 미국법 실무(24)-가을이 와서 쓰고 싶었던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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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연 미국변호사의 미국법 실무(24)-가을이 와서 쓰고 싶었던 이야기들
  • 박준연
  • 승인 2020.10.29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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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연 미국변호사
박준연 미국변호사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덥고 습한 여름이 끝나고, 도쿄에도 드디어 가을이 왔다. 꼭 예술의 계절 가을이라서가 아니고 나는 언제나 예술 활동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로스쿨 졸업 후 예기치 않은 시간 여유가 있었을 때에는 당시에 유행하던 스케치 레슨에도 가고, 개발이 막 시작되던 브루클린 고와너스 운하 구 공장지대의 스튜디오에 시 수업에도 갔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한테는 예술적 재능이 없다는 사실만 아픈 교훈으로 남았다. 그나마 활자는 매일같이 읽고 쓰기 때문에 부담이 덜하지만, 일상적으로 글을 읽고 쓰는 것과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을을 맞아, 다들 처음 겪는 이 시기에 대한 감상을, 귀중한 지면을 통해 나누고 싶다. 좋아하는 작가 프랜 리보위츠가 뭔가를 쓰고 싶은 충동이 들더라도, 그 글이 명작이 될 턱이 없으니 그냥 단 걸 먹고 잊어버리라고 했었다. 그런데 최근 찰스 부코스키의 “글쓰기에 대하여”라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글을 써서 밑질 일은 없다 (There is no losing in writing).

“다른 곳에서, 다른 때 만났다면,” 그리고 프로페셔널리즘

어느 직업에나 수반되는 다른 곳에서 말할 수 없는 어두운 이야기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변호사의 업무가 특별하다고 엄살을 떨 생각은 없다. 하지만 소송 뿐만 아니라 불상사로 발전할 가능성이 큰 일, 이미 불상사가 되어버린 일을 조사하는 업무를 하다 보면, 변호사의 비밀유지 의무 때문에 제3자와 공유할 수 없는, 픽션보다 기이한 사실에 직면할 때가 있다. 성실하게 자료를 분석하고, 법리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냉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전문가의 역할이다. 하지만 모든 사실 관계가 자료로 남아있는 것은 아니고, 관련된 모든 사람과 무한정 이야기(인터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존경하는 선배들이 어떻게 하는지 보고 배워왔지만 정작 내게 닥치면 선배들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지도 않는 느낌이다. 하지만 프로로서의 최소한의 미덕은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 관련된 사람들을 존중하고, 예의를 갖춰 대한다는 것이다. 힘든 조사가 거의 마무리될 때 다른 기회로 변호사님과 알게 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눈 앞에 닥친 업무처리 때문에 깊은 생각없이 넘어갔지만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그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클라이언트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지 않으면 업무적으로 만날 일이 없는 업무 분야를 주로 담당하는 직업인에게는 큰 칭찬이라고 멋대로 생각해 보았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생각

얼마 전 다른 오피스의 동료가 퇴직하면서 비디오로 송별회를 했다. 예전 같으면 근무하는 오피스에서만 모임을 가졌겠지만, 그 동료가 현재 주로 재택근무가 진행중인 여러 오피스와 함께 업무를 했기 때문에, 그리고 최근에는 공식적, 비공식적 회의와 모임을 비디오로 개최하는 데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물론 메일로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비디오로 송별회가 개최되어 화면으로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 외의 학술행사도 그렇다. 재미있게 읽은 책의 저자가 홍콩에서 진행하는 취재 뒷이야기, 책 출판 후 최근 동향을 이야기해주는 것을 화면을 통해 보고 들으며 이동이 어려워지면서, 시차도 있는 지역 간의 비디오 회의 개념이 보편화 되었다는 실감을 새삼스럽게 하게 되었다. 예외적인 경우에만 비디오 회의를 실시하고 그 전에 기술적인 문제가 있을까봐 몇 번씩 소프트웨어 다운로드와 설치가 잘 되었는지, 회의 접속 속도에는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인데 말이다. 쉽게 (대면으로) 만날 수 없다는 전제가 기본으로 깔린 지금, 기술을 통해 시공간의 장벽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도 부단히 전개되고 있었구나.

판데믹 시대의 로스쿨

미국 로스쿨 재학생들의 인터뷰를 봤다. 사회 변화가 있으면, 학생을 비롯해서 이후의 진로를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특히 큰 영향을 받는다. 미국발 금융위기때도 그랬고, 이번에도 그렇다. 한 학생이, 로스쿨을 진학한 학생들은 대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데 불확실한 시대에서 계획을 세우기 어려워졌다고 하면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또 다른 학생은 자기는 학교 도서관에서 주로 공부를 했었는데, 집에서 온라인으로 수업 수강하고 공부도 하다가 보니 공부와 생활의 경계가 사라진 느낌이란 이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마음만 들지는 않았던 것은, 환경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엿보여서였다. 교과서(케이스북)를 주문해도 바로 배송이 되지 않아 앞부분 리딩 부분을 학교에서 스캔해서 보내주었다는 이야기, 교수도 학생들도 빨리 온라인 세팅에 익숙해졌다는 이야기가 그랬다. 이 학생들도, 나도 다들 이렇게까지 길어질지 모르면서도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온 만큼, 딱 그 만큼은 자랑스러워 해도 되지 않을까.

마무리에 대하여

올해 2월, 멀지 않은 곳에 메밀국수(소바) 음식점이 문을 닫았다. 아주 작은 규모인데다가, 서서 먹는 시스템이었다. 손바닥만한 표찰이 가게 밖에 걸려있어서 처음에는 음식점인지도 몰랐고, 내부를 들여다봐도 뭐하는 곳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해서, 가게 이름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서 정체를 알아내었다, 어두운 실내에는 검은 대리석 테이블이 있고, 가운데에는 꽃꽂이 장식, 그리고 벽에는 이 음식점이 종종 등장했던 유명한 만화의 원화가 몇 개 걸려있는, 일본인 친구들을 데려가도 독특한 분위기에 놀라는 가게였다. 처음 갔을 때는 일행 끼리 온 손님들이라도 묵묵하게 소바를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메뉴는 딱 소바 세 종류. 그 외에 주류나 다른 음료도 메뉴에 없다. 게다가 저녁 7시 전에 재료가 떨어졌다며 세 개 뿐인 메뉴 수가 줄어드는 경우도 허다했다. 올해 초 간만에 이곳의 소바를 먹고 싶어서 일찍 퇴근해서 찾아갔더니 추운 겨울날도 더운 여름날도 가게 밖까지 늘어섰던 행렬은 없고, 닫힌 문에는 A4용지가 붙어있었다. “드디어 가게의 수명이 다한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과분한 사랑을 주신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감사의 장미를 대신하여.” 어쩌다 생각날 때 간 정도의 어정쩡한 손님이었지만, A4용지에 작은 글씨로 쓴 이 벽보의 사진을 찍어 두었다. 그 이후 이 앞을 지나갈 때 벽보의 사진을 찍는 사람을 두 명 목격하였으니 나만 아쉽고 섭섭했던 것은 아니지 싶다. 고추기름과 신선한 파가 듬뿍 들어간 고기 소바도, 다른 손님들과 팔꿈치를 부딪쳐가며 묵묵하게 소바를 먹고 달걀을 넣을 타이밍을 고민하던 시간도 그때는 당연해서 고마움을 몰랐다.

박준연 미국변호사는...

2002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 제37회 외무고시 수석 합격한 재원이다. 3년간 외무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미국 최상위권 로스쿨인 NYU 로스쿨 JD 과정에 입학하여 2009년 NYU 로스쿨을 졸업했다. 2010년 미국 뉴욕주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후 ‘Kelley Drye & Warren LLP’ 뉴욕 사무소에서 근무했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로펌 중의 하나인 ‘Latham & Watkins’ 로펌의 도쿄 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필자 이메일: jun.park@l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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