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박원순, 백선엽, 최현숙 세 사람의 죽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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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박원순, 백선엽, 최현숙 세 사람의 죽음 앞에서
  • 오시영
  • 승인 2020.07.17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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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죽음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끝이다.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은 신의 영역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영역이다. 모든 생명체는 영원을 약속할 수 없지만, 역사는 모든 죽음을 영원으로 만든다. 매 순간 많은 것들이 기록되는 현대사회는 역사의 분량을 늘리고 폭을 넓히고 깊이를 깊게 한다. 하지만 설령 주인공일지라도 자신이 승리자인지 아님 패배자인지는 그 자신도 모르고 역사도 모른다. 역사는 불변의 기록을 가변의 세계로 끌어내 난도질하고, 그 가변의 역사를 다시 불변의 역사로 기록한다. 객관적 역사는 살아 있는 생물이 된다. 주인공마저 인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삶이 모든 객관적 관중의 시선에 의해 관점의 각도가 휘어지는 프리즘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자신의 역사를 어떻게 써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어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실제 고민하고 살겠는가? 그냥 하루 살아남기 버거워, 하루 탐욕의 그릇을 다 채우지 못한 허기짐으로 마냥 퍼먹고, 퍼마시고 살아가는 짐승 같은 삶을 살기도 한다. 그러면서 인간으로 평가받고 싶어 아등바등대는 것이 바로 미완성 인간 아니겠는가?

최근 들어 우리는 각기 다른 세 종류의 죽음을 맞는다. 자칭 피해자와 타칭 가해자의 자살이라는 두 죽음과 상반된 평가를 받던 한 인간의 오랜 장수 끝의 자연사이다. 철인3종경기(트라이애슬론) 국가대표선수 출신인 최숙현 선수의 자살과 서울시 박원순 시장의 자살 및 육군대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의 자연사가 그러하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철인경기선수였던 철인 최숙현 선수의 죽음은 감독과 팀닥터, 그리고 선배 선수의 폭행 및 가혹 행위를 견디다 못해 끝내 가장 나약한 인간이 되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제 겨우 23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그의 죽음에 대해 수사가 진행 중이니 그 가해 행위들은 일부 감춰지거나 숨겨질지언정 밝혀질 것이다. 팀닥터라는 자는 의료관련 어떠한 자격도 없으면서도 스스로 팀닥터라고 칭하며 물리치료를 빙자하여 최 선수의 가슴과 허벅지를 만지는 등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였을 뿐만 아니 금품을 요구하기도 하였고 폭력행위 등을 가한 죄로 구속되어 수사 중에 있다. 왜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것일까? 필자도 군대 폭력이 난무하던 70년대 군대생활을 하면서 몇 번 상급자로부터 이유 없는 폭행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상급자의 폭력이 몇 번 계속되자 후배들과 함께 들고일어나 그 상급자를 군법회의에 회부시켜 처벌받게 하였던 적이 있었다. 하극상이 엄하게 처벌받던 유신독재군대였지만 집단적인 하급자들의 상급자에 대한 저항이었음에도 정당성이 인정되어 상급자만 처벌한 채 마무리가 되었다. 그때 깨우친 교훈은 감춰져 있으면 어둠의 세력이 활보하지만, 들춰내면 어둠이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필자는 군 생활 동안 한 번도 하급자를 폭행해 본 적이 없다.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서 때릴 수 있는지 그 속마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전역 시 후배들의 필자에 대한 무폭력 전역 축하인사를 받은 것은 내게는 두고두고 귀한 인생의 교훈으로 작용하고 있다.

강한 물리력이 요구되는 운동이라는 특수 영역에서는 물리력과 정신력을 강화하기 위한 훈련의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람을 폭행하거나 훈련을 빙자한 가혹 행위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이러한 훈련체계를 개선하겠다고 약속을 수없이 반복하며 구체적 매뉴얼을 작성 시행하고 있지만, 현장에서 이러한 문화가 바뀌기에는 아직 역부족이다. 지금의 체육지도자들이 “감독과 선배로부터 맞고 훈련받은 기억”밖에 없으므로 시대가 바뀌어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맞은 놈이 패는 놈”이 되는 세상은 피해와 가해가 한 인격 안에 체화돼 있는 한 바뀌지 않는다. 그러려면 누군가가 “맞는 마지막 세대, 때리지 않는 최초의 세대”가 되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을 과감하게 탈피하려면 무언가 극단적 처방이 필요하다. 그러한 단절을 완성하려면 결국 교육과 처벌밖에 없다. 문제는 체육협회의 대부분 지도급 인사들이 이러한 폭력에 가장 무감각하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이 체육선수 출신인 체육협회 임원진 및 지도자급 인사들은 그렇지 않은 분도 있겠지만 체육선수로서는 특이하게 정치적 성향이 강한 이들이다. 몸을 쓰는 이들이 머리를 쓰는 지혜까지 터득하여 그러한 지위에 오르기까지는 수많은 아부와 협잡 등 공생관계가 존재하여야만 가능하다. 지금도 체육협회 내 파벌관계로 인한 파열음이 수없이 터져 나오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니 서로 형님, 아우 하며 얽히고설켜 서로의 치부를 덮어주고 감춰주는 공생관계에 있으므로 더욱 이러한 체육계 폭력과 성추행 등의 비위 사실의 단절이 어려운 것이다. 건전한 생활체육으로의 전환을 위한 획기적 정책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은 많은 국민을 커다란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다. 지나치게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평생을 수많은 민주화운동인사에 대한 변호인으로, 특히 권인숙 성고문사건의 변호인으로 활동하며 인권변호사로 널리 알려졌던 그가, 역사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 역사문제연구소 초대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던 그가, 참여연대를 결성하고 아름다운 가게를 여는 등 사회운동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시민참여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던 그가, 최장수 서울시장으로 서울시 행정을 총책임졌던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그의 죽음 선택이라는 결정에는 한 젊은 여비서의 4년간의 성추행 피해 고소사건이 연관된 것으로 알려졌다. 평생 인권변호사로 일생을 살아왔던 그가 인생 말년에 “성추행 가해자”로 고소당하였고, 그게 원인이 되었는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의 장례가 서울시장(葬)으로 치러지는 것에 대해서도 견해가 갈라지기도 하였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일생 참으로 많은 의미 있는 활동을 하였다. 자신이 대학 재학 시절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제적을 당하기도 하였고, 사법시험 합격 후 검사로 임관하였지만, 전두환 군사독재정권 밑에서 공안업무를 담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직 후 시민운동에 뛰어들어 인권변호사로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의 형사사건을 변호하였고, 제대로 된 사회운동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던 당시 상황에서 역사문제연구소, 참여연대, 아름다운 재단, 희망제작소 등 수많은 사회복지 운동을 전개하다가, 10여 년 전 서울시장에 당선되어 죽기 직전까지 재직하며 거대한 서울시 행정을 다루어왔다. 그의 사회적 공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60대 중반의 그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여비서 성추행범으로 고소당하고, 경찰 조사에 앞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하고 말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의 입은 살아 앞으로 계속 수많은 이야기들을 전할 것이다. 시중에는 4년 전에 발단이 된 사건을 뒤늦게 문제 삼은 피해 여비서를 두고 음모설이 제기되기도 하고, 사소한(?) 성추행 사실로 귀한 목숨을 끊은 그의 행동에 대한 비난도 크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닌 어느 누가 어찌 그의 심정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 박원순, 그의 죽음으로 그에 대한 형사고소사건은 공소권없음으로 종결되었다. 그런데도 피해자는 변호인을 통해 다시 한 번 피해사실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변호인이 밝힌 내용 중 가장 중하게 보이는 것은 텔레그램 비밀대화방에 초대한 사실(실재 초대에 응하였는지, 어떠한 대화를 나누었는지 등은 발표되지 않아 그 내용을 현재로써는 알 수가 없다), 고소인이 비서로 근무하는 동안 문자나 사진 등으로 괴로움에 대해 친구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다는 전언(문자나 사진 등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아 성추행의 직접증거는 아직 제시되지 못한 상태이다), 셀카를 찍자며 집무실에서 촬영할 때 밀접한 신체접촉이 있었다거나 고소인 무릎의 멍을 보고 ‘호’해 주겠다며 무릎에 입술을 접촉하는 행위를 하였다(이 부분은 고소인의 주장만 있을 뿐 역시 객관적 증거는 제시되지 못한 상태이다), 시장집무실의 내실 안에서 ‘안아달라’고 했다거나 ‘속옷만 입은 사진을 전하며 성적으로 괴롭혀왔다’는 주장(이 부분도 아직 객관적 증거가 없는 상태이다) 정도이다.

서울시에서 자체 진상조사를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였지만, 가해자라 지칭되는 이가 죽고, 피해자라 자칭하는 이가 공무원을 사직하였는데 서울시가 어떠한 권한에 의하여 이를 조사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다. 하지만 고소인의 주장이 실체적 진실의 한계를 초과하여 모두 진실로 고착되어서도 안 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유일한 진실규명 방법은 고소인이 주장하듯 휴대전화 내에서 이루어진 일이 대다수이므로 양자의 휴대전화 포렌식을 통해 수사기관이 밝힐 수밖에 없는데, 그러려면 고소인 측의 기자회견 등이 사자명예훼손(친고죄로 고소권자의 고소가 선행되어야 한다)에 해당된다는 고소가 있거나, 또는 고소인에 대한 2차 가해행위자들에 대한 형사 고소 등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이는 진실을 주장하며 명예를 훼손한 것인지, 허위사실을 주장하며 명예를 훼손한 것인지에 따라 죄명과 형량이 달라지기 때문에 고소인의 주장에 대한 진실 여부를 밝힐 필요가 생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의 수사나 진상규명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백선엽 장군은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젊은 시절 일본군 장교로 자원입대하여 만주 등지에서 수많은 대한독립군을 토벌하며 반민족친일행위를 한 사실은 그가 스스로 자신의 자서전에서 밝힌 바 있고, 친일반민족행위자조사특별위원회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모두 확인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승만 정부 시절 대한민국의 군인이 되었고, 6.25 전쟁 덕에 불과 34살의 젊은 나이에 육군대장으로 진급하여 육군 총참모총장이 되는 행운을 거머쥐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조국을 구한 구국의 영웅으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40세에 전역하여 장관 등 수많은 공직과 거대기업의 회장이 되어 세상에서 말하는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다. 그는 육본 정보국장직에 재직하던 1948년부터 남로당 숙군(肅軍)을 주관하면서 당시 남로당 군사책으로 공산당 활동을 하던 당시 박정희 소령을 사형집행 열흘을 앞두고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그를 사형에서 배제하였고, 그 후 박정희 소령은 군내에서 남로당 당원을 밀고한 공로로 승승장구하여 결국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이 됨으로써 대한민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완전히 바꾸는 중심인물이 되었다. 두 사람 다 역사가 뒤바뀐 것이다.

그의 공과를 두고 진보와 보수진영은 상반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공산당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보수진영이 남로당에 가입한 박정희 대통령이나, 그를 살려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 백선엽 장군을 구국의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백선엽 장군이 쓴 “6‧25전쟁에서 60년”이라는 저서에 적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가 100세의 나이로 죽음이 임박했을 때 진보와 보수진영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이므로 국립묘지에 안장할 수 없다는 견해와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므로 당연히 안장되어야 한다는 견해로 나뉘어 극심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가 박원순 시장의 죽음에 이어 운 좋게(?) 죽었고, 진보진영은 박원순 시장이 던져 놓은 도덕성 시비로 인해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수많은 동포와 독립군을 무참히 살해했던 그의 친일부역행위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그의 대전국립현충원 안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어찌 보면 죽음을 맞아 장지 문제를 놓고 치열한 비난의 논쟁거리가 될 수 있었던 백선엽 장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는 행운을 얻은 셈이다.

오직 철인종목운동만을 전념했던 피해자 최숙현의 죽음, 일생을 선한 영역에서 치열하게 살았지만, 마지막 한순간 비난의 대상이 되어 스스로 천수를 포기한 채 죽음을 택한 박원순 서울시장, 젊어 혈기 왕성했던 시절 민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수많은 살상을 자행했던 친일반민족행위자가 6‧25전쟁 과정에서 구국의 영웅으로 환골탈태하여 100세라는 드문 천수를 누리고 죽음을 맞이한 백선엽 장군을 지켜보며, 삶과 죽음의 경계 위를 매일 걷고 있는 인간을 본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생인가? 아마 세 사람의 죽음을 맞이한 신도 조금은 어리둥절해 하지 않을까? 신이시여, 그대는 정답을 아십니까?

오시영 전 숭실대 법대 학장 / 변호사 / 시인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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